제시어 쓰기 (제시어: 고향)
제시어
고향
이런 식으로 돌아갈 줄은 몰랐다. 고향은 그에게 고되고 위험한 곳이다. 떠난 것이 당연한 곳. 돌아온다면 크게 한 몫 잡고 여생은 그저 즐겼다는 지루한 이야기를 써 내고 싶었다. 가장 한가한 소리를 하며 한심하게 살고 싶었다. 고향은 그가 애쓸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곳. 그런 줄 알았다. 행성에서 방출되는 마를리오니 또는 마를리오네 파(波)는 일반적으로는 측정할 수도 없는데, 행성 규모에서 발생하고 굉장히 멀리, 수 광년에 걸쳐 장(場)을 형성한다. 이 파장은 생물의 의지에 작용하고, 이를테면 무언가 믿게 하거나 믿음을 강화했다. 물고기에게 물이 생의 조건이지 ‘물에 중독됐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통은 무해한, 그래서 아무 관심도 갖지 않는 마를리오니 파는, 하지만 몇몇에게는 큰 영향을 미친다.
마를리오니 파에 대한 감도가 유독 높고 수용성이 커서 일반적 영역 바깥까지 가서도 상당 기간 체내에 유지되는 이들이 있는데, 말하자면 내부 피폭 같은 상황이다. 이런 이들을 적셔라고 부르고 그는 바로 그 적셔다.
적셔에게는 기도와 성물이 마약처럼 기능한다. 적셔들은 광신적 열정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과학적 인과를 입증할 수 없지만 예지나 투시, 괴력 심지어 일부는 다중 동시 현존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어디까지 유용한 혹은 무용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다 알지 못한다. 그는 갓난아기 때부터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았고, 자신은 ‘못 볼 걸 봤다’고 중얼거리곤 하였다. 고향을 떠난 건 그 끔찍한 하루하루를 견디기 힘들어서였고, 그가 성마르거나 끈기 없지 않지만 충분히 강렬하고 일상을 영위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진영(眞影)들 때문이다.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
고향을 떠나서 그는 금단 현상을 겪었다. 온몸에 벤 자국, 타박상, 붓는 증세, 화상 등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이십칠 년째 한 번도 잠이 든 적이 없다. 마를리오니 파 발견 이전에 이는 정신증의 신체화로 분류돼 더 강하게 자극을 주거나 자극을 전부 차단하는 등 상충하는 치료법이 시도되기도 했다. 밝혀진 바 나았다고 여긴 사례들은 결국 환자 — 적셔가 무익한 치료에 지쳐 병증을 감추고 가장(假裝)한 것이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지만 그는, 아마 다른 많은 적셔들도, 저마다 숨긴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구하고자 하는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더 멀어지고 있었다. 마를리오니 파가 충만한 곳, 거기에 가야 그의 힘은 도리어 멀리, 그리고 그를 구할 만큼 충분해질 것이다. 어쩌면 넘칠지도 모른다. 만일 모자란다면 힘들게 끊어낸 금단의 세계로 발 들여도 좋다. 그는 손을 뻗어 성물을 쥐고 기도 줄을 팔에 둘렀다. 다른 기도 줄을 목에도 둘렀다. 몸은 불타지 않고 불탔으며 천사들과 망령들이 삽시간에 모여와 그를 둘러쌌다. 그가 편 손을 접고 기도하자 그날, 한 우주는 절멸하고 다른 우주가 태어났다.
그가 그하려는 사람은 원시의 플라즈마로부터 나뉘고 뭉쳐 마침내 동일한 의미 배열에 이르고 같은 감정과 같은 지각이 깨어났다. 그리고 그와 그의 동종은 똑같은 길을 걷고 똑같은 짓을 감행해 파멸하고, 그는 다시 기도하고 손을 쥐었다.
손을 펴고 손을 쥐고 다시 펴고 다시 쥐고…. 오늘 그는 수백억 년마다 되풀이한 행동을 멈추고 그가 죽고 사라지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우주가 스스로 차갑게 식어가는 걸 바라보았다.
적셔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우주의 끝을 지켜보자 적셔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눈물을 흘리고 울며 하나둘 사라져갔다. 그는 그들과 한몸이 되고 사라진 것들을 모조리 제 것으로 낱낱이 그리고 온통 경험하였다. 영원한 눈물 속에서 그는 자비롭게 말할 수 있었다.
“생겨나라.”
그리고 기꺼이 적셨다. 나는 너, 너는 나. 우리는 하나인 걸.
(2023.10.23. 열차 안에서)
제한 사항 | 5분, 멈추지 않고, 제시어 ‘고향’으로 가능한 ‘먼 이야기’ 쓰기, ‘멀리 나간’ 이야기 쓰기.
예외 사항 | 5분이 되고, 5분이 지나도 멈추지 않고 쓴다면 멈칫할 때까지 계속 쓸 수 있음.
실행 사항 | 5분 종료 후 21분 연장하고 마침. 총 26분 동안 만년필로 공책에 쓰고, 완성된 것을 수정 없이 전산 입력함.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