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형제, 『헨젤과 그레텔』 같이 읽기 (2)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림 형제 민담집의 다른 많은 이야기들도 그렇지만 그 잔혹성 때문에 무성한 뒷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잔혹동화류가 한동안 출판계에 유행하기도 하고,
이런 유행이 여기저기서 번갈아 재유행하기도 하더군요.
그중에서도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는 한스 트락슬러(Hans Traxler)에 의해
1963년 『Die Wahrheit über Hänsel und Gretel』(『헨젤과 그레텔의 진실』)이라는 풍자 소설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실은 작가가 허구로 만든 가공인물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게오르크 오세그(Georg Ossegg)가 17세기 벌어진 범죄 사건을 추적하고, 이게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로 민간에 변형 전승된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진실이 어떻게 허구로 바뀌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 형제가 수집한 독일 전역에 퍼진 민담들은 정말로 다채롭고
또 두 형제는 유사한 이야기들의 가장 풍부하고 공통된 판본을 찾아 실었습니다.
이백 편의 민담과 열한 편의 어린이전설(그림형제가 개정증보하여 낸 7판까지 계수한 것) 모두가 배경이 되는 사건을 가졌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의 표정을 보면 그것만 영상으로 담아도
멋진 단편 영화가 한 편 완성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 꿈나라의 한가운데로 풍덩 뛰어들어
듣는다기보다 직접 경험하고 돌아나옵니다.
이제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동화를 접한 아이들은 현실로 그 이야기를 가지고 나옵니다.
이갈이가 끝날 무렵까지 아이들은 어른들이 강제로 요구하고 훈련시키지 않는 한
상상의 이야기와 현실의 이야기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어제 나와 종일 공기놀이도 하고 사방치기도 하며 놀던 아이가
오늘 와서는 달려와 어제 자신이 서울 가서 놀았다고도 하고
거북선을 탔다고도 하고 다시 일본에 다녀왔다고도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이의 정신이 여행하고 행한 것을 한꺼번에 쏟아낸 것입니다.
또한 열 살이 되기 전 아이들에게 시간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오늘의 축복으로 어제의 비참함을 씻어내기도 합니다.
단순히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아, 이제 괜찮아,가 아니라
나에게는 그늘이 없어, 비 온 적이 없어, 하는 지경까지 간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잊은 것은 아니고, 혼동하지도 않습니다.
되물으면 또렷하게 기억하고,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금 자기의 완성된 서사에서는 더 완벽한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같은 아이들끼리는 전혀 걸리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혼자만의 상상이 곧장 공유하는 환상이 됩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너무 일찍 강제로 환상에서 끄집어내집니다.
마치 덜 자란 태아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는 것은 저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아이의 정신은 칼날에 저미듯 폭력에 노출된 것입니다.
그럼 환상의 세계에서의 끔찍한 악은 어떤 것일까요?
거기서는 선은 보답받고, 악은 응분의 처형을 당합니다.
그러지 못한 이야기, 어설픈 용서와 화해는
아이를 몇날 며칠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불의에 마주쳐 움츠러들고 저항하지 못하게 합니다.
반면 헨젤과 그레텔처럼 잔인하게 마녀를 죽이는 이야기는
악이 완전히 소멸한다는 안도감을, 시원함을 줍니다.
아이들은 불의에 맞서고,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할 용기를 갖게 됩니다.
물론 이후의 이야기는
이 세상이 그들의 용기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참여형 이야기인 것이지요.
헨젤과 그레텔은 잔인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마주치는 ‘첫이야기들’은 가치의 다발을 이루고
세상의 본질을 비추어줍니다.
하물며 성인도
신문기사를 보고 재판기록을 보면서도
저모르게 세계에 대한 미결된 신화들을 써내려갑니다.
어른들이 얼마나 자주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갇혀 ‘세상은…’ 원래 그렇다는 둥하며 어쩌구저쩌구 이야기하는지 듣지 않았습니까?
예람, 그대는 이미 그런 어린이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굳어버린 성인도 아닙니다.
마지막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의 시기 동안
우리는 잘못 땋은 패턴을 풀고서 다시 뜨개질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나요?
더 정의로운 세상, 더 정직한 세상, 더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는가요?
우리는 한 개체로는 약하고, 한 세대로서는 유약할지라도
면면히 흐르는 흐름을 통해
연속체의 일부로서도 살아갑니다.
더 큰 생명 안에 놓인 낱생명입니다.
낱낱의 우리가 스스로를 어떤 이야기 속에 두는가는
아주 어려서는 남의 손에 의할지 몰라도
이제는 아닙니다.
그대가 자신이 놓일 이야기를 선택하고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대는 어른이 되기 시작합니다. 아니,
‘한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세상이, 신이 대화할 ‘상대’가 됩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