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물길

역사의 화살

by 이제월


방향이 있을까?

그러니까 누군가 화살을 쏘아 시위에서 놓인 살이 날아가는 방향이 있는가.

의식의 의도이든 무의식한 의도이든

쏘는이가 노리는 쏜 곳이 있을까.

그러므로 지금 각각의 행위는 방향에 맞거나, 방향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별할 수 있는가?


역사의 화살’이라는 말을 접한 뒤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답니다.

그대는 이 표현을 들어 보았는가요?


1927년 아서 에딩턴(Sir Arthur Eddington)은 자신의 저서 『The Nature of the Physical World』(아마도 『물질 세계의 본성』 정도로 옮길 수 있겠죠?)에서 ‘시간의 화살’(The Arrow of Time)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열역학 제2 법칙 즉, 엔트로피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할 뿐, 역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썼습니다.

195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결정론을 비판하면서 칼 포퍼(Karl Popper)가 ‘역사의 화살’(The Arrow of History)이라고 빗댄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누가 처음 ‘역사의 화살’이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표현 속에는 역사가 정해진 방향을 가지고 있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바람 등 외인으로 인해 중도에 약간의 변경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화살이라는 건 애초 시위를 당긴 자가 겨눈 방향이 있고, 거기 가 닿으면 맞는 거고, 아니면 빗맞는 것이니까요.

이는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부터 ‘조명된’(illuminated) 것으로 바라보기를 그치고,

기계장치의 내부구조처럼 설계된 자체의 빛을 ‘계몽’(enlightenment)하는 것으로서 이성을 정의하는 사고의 전환, 데카르트 이후의 이 변화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제 밖으로부터 규준하는 신이 없으니 무언가 준거와 방향, 척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실제 프랑스혁명이 삼신분 가운데 귀족과 성직자를 동시에 내쫓고, 왕마저 폐위하면서 프랑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를 배격하였지만, 곧 민중의 두려움과 소망에 부응해 혁명 세력은 허겁지겁 이성신(理性神, Culte de la Raison)을 대체물로 내어준 역사가 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이성의 신전이 되었고, 여기서 처음으로 에베르파(Hébertistes)가 이성의 여신을 공개하였지요.

인류는 신과의 연결을 결국 속박으로 느꼈고(혹은 제 손으로 바꾸었고), 더는 그리스도교의 출발이 된 ‘해방하는 복음’을 믿지 않고 떠났지만

스스로 속박하는 길을 택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변명하자면

어쩌면 적어도 그때에는 갓난아기처럼 베냇저고리로 꽁꽁 싸매는 것만이

안전감을 줄 뿐 아니라 실제로도 흔들리는 머릿속을 안전하게 지키는 길이었을지도요.


인류 문명 대부분의 시기 동안 시간 개념은 순환적이었습니다. 인도나 중국 등 아시아지역뿐 아니라 유럽에서나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 인식은 한 번뿐인 역사, 단 한 번의 완전한 구세사를 그려냈고,

시간에 일방향성을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때의 영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이 아니라

창조된 영원 즉, 끝이 없지만 시작은 있는 영원, 에온(Aeon)입니다.

출발에서 불완전한 이 영원은 끝에서는 참 영원과 온전히 하나되므로

불완전한 인간 혹은 죄에 물든 인간이 깨끗해져 신과 하나된다는 구원의 이념과도 일치합니다.

스틱스 강물을 마시지 않아도 우리의 불완전함, 세계의 불완전함은 이제 해명됐습니다.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자유주의 대 전체주의.

우리는 흔히 이런 대비에 익숙하지만 사실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민주주의건 사회주의건 전부 근대의 ‘자유주의’입니다.

다 역사에 맞는 방향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1980년대 말 구 소련의 붕괴, 90년대 빠르게 이어진 공산권의 붕괴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에서 자유주의가 승리한 게 아니라

역사에 어떤 방향이 있고, 인간의 자유가 그리로 이끌린다는 자유주의 이념의 붕괴에 다름아니었답니다.

최소한 역사와 관련하여 인간 안에는 법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침 1990년대 유럽에서 지낸 미국인 리처드 로티는 이 현상을 관찰하고

역사의 필연을 부정하며,

그렇다면 상대적 관계에서 저들의 패배도, 우리의 승리도 아닌 이 붕괴는 무엇인가 자문하고는

우연성과 아이러니 그리고 연대성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유독 선풍적 인기를 끈 유발 하라리도 『사피엔스』에서

역사에 방향 따위 없다고 선을 긋습니다.

일어난 일의 인과관계를 묻고 따져볼 수 있겠으나 그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우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고 우리는 다른 경로를 밟았을 수도 있으나

그저 그렇게 했던/됐던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지금도, 나중에도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하고 달리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종종 오늘의 이야기가 소환될 것입니다.

역사에 필연 따위 없다면,

인간의 삶 혹은 인류의 행보에 정해진 행선지 따위가 없다면

이건 좋은 소식일까요, 나쁜 소식일까요?

희망에 설레야 할까요, 공포와 두려움, 걱정에 휩싸여야 할까요?


우리가 헤엄치는 물길을 헤치며

거듭 말하지만 헤치면서[行]

이야기하고, 더듬어 알아가 봅시다[知].


벌써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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