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지난번 ‘멈추라’는 주문을 하였습니다.
그게 모든 싸움의 시작, 이기는 싸움에서 이기는 자의 첫 초식이라고 했습니다.
이기는 것은 거짓을 물리치고 참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참되지 않고 이기는 건 가짜니까요.
그런 건 복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참되고 아름답고 이것이 끝까지 이어지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 서로 다른 게 아닙니다.
그러나 다르게 이야기할 것들이 있어 나누어 다룰 뿐입니다.
멈추고 나서 무얼 어찌할까요?
사는 길은 무언가요.
멈추어 서 있기만 하면 무얼 할 수 있다는 건지
아니, 애시당초 서 있기만 하다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게 아닌지.
나는 무방비로 노출되지 않는가!
소리쳐야 할 계제 같습니다.
멈추어서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눈이 있다면 이것저것 보일 겁니다.
그러나 이리저리 눈속임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차라리 눈은 감으십시오.
(눈을 떠도 좋습니다.)
당신이 눈 뜨는 건 육체가 아니라
정신체입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냥 보십시오.
보이는 대로 휘둘리지 말고
보라는 겁니다.
수유왈강(守柔曰强).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합니다.
보는 나를 지키십시오.
바위처럼 꼼짝도 않고 뿌리내리고
보십시오.
나는 봅니다.
내가 본다는 건
보이는 것들이
내가 본다는 걸 모를 때까지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 하는 것으로 비칠 터입니다.
삼라만상의 만유*
이것은 저것이고, 그것이 이 모든 것인 전체.
이 전체는 가장 작은 입자 단위에서부터
‘봄’에 취약합니다.
무언가가 바라봄은
보이는 것의 현상을 바꿉니다.
관찰자의 시선은 입자를 재배치하고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찰나(刹那)에
그것의 위치 아니면 속도
둘 중 하나만 측정할 수 있습니다.
가장 정확한 식은 답을 특정하지 않고
단지 범위만,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범위만 두릅니다.
테두리를 치고, 그 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할 수는 있지만
실제 사건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관계를 주고받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부는 아니라도
완전하게까지 아니더라도
우리가 본다는 것을 잊을 만큼 보면
가장 진상(眞相)에 가깝게, 가장 높이, 깊이 진여(眞如)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매 찰나마다 그렇습니다.
영원히 그럴 것 같으면 상대가 승복하고 나오고
영영 그럴 것 같지는 않다면 상대가 제가 이길 거라 버티고 나섭니다.
그대는 멈추되 영영 멈추지 않고
상대의 덧없는 움직임을 멈추십시오.
그가 자신을 드러내도록
생각하는이, 그대는 그저 보십시오.
본다는 것을 잊을 때까지 보십시오.
영영 그러리라는 것을 알면
금세 잊고 제 모습이 됩니다. 본래 진면목(本來眞面目)을 보입니다.
보고 있어요?
休
*萬有. 파네테이아Panenteia 또는 Panta(πάντα, 모든 것들) 또는 ens univers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