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나무야

멈추는 권능을 배운다

by 이제월




배움에 이런저런 면모가 있을 터이나

왕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바라려면,

혹은 소크라테스의 지덕복합일설(知德福合一說)을 대표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양명은 배워서 아는 바를 행해야 비로소 깨쳤다고 할 수 있으며, 배우는 건

결국 그걸 행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는 양명학의 기틀을 이루고 성리학의 논구를 몸에 체화하는 것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누구도 자발적으로[제 의지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는다”("οὐδεὶς ἑκὼν ἁμαρτάνει")는 말을 남겨서

지행합일 이론과 입장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선을 아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이며, 그것이 복된 삶”이라는 논지를 이어갑니다.

이는 자연철학자들의 관심이 인간으로 옮겨지고

인간을 척도로 삼은 소피스트들의 논의가 결과중심에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로 흐르다가

어떤 객관성을 추구하게 되고, 윤리를 다루게 되는 시초입니다.

무엇이 선한가 하는 윤리적 질문은 무엇이 복된가 하는 물음을 내포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행복은 윤리학의 주된 물음으로써 선과 쌍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어떤 철학적 논지의 깊이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느 만큼씩은 다 지행격차(知行格差, Konwing-Doing Gap)를 줄이기를 바랍니다.

이건 우리 일상의 문제이고

서점에 깔린 자기계발서들의 달콤한 약속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살짝 다들 빼 먹는 것을 소크라테스가 이 유구한 논의의 첫머리에

이미 하고 있습니다.

ἑκὼν (hekṑn)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자진하여, 기꺼이 하는가.

— 의지의 문제.


보통 소크라테스의 이 지적은

누구든지 의도해서 죄를 짓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본래 선할 것이다, 라거나

몰라서 그러는 거지 알면 안 그런다, 안다는 게 무어냐 정도로 이야기되는데

자꾸 놓치는 것은 이 의지가 ‘자유의지’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확하게 ‘자유의지’를 논구한 건 아우구스티누스쯤 가서야이고

그 전에는 의지를 딱히 자유로운 의지라고 보태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성격이 구체화되고 어느 만큼은 분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은 건 자기 의지에 의한 것인가요?

비몽사몽 간에 허겁지겁 먹은 것은 어느 만큼 의지에 따른 것인가요?

아무런 강제도 없는데 자기 의지가 아니라 할 수는 없고

그렇지만 명확한 인식을 갖지 못한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하룻동안 아무런 외부의 강압 없이 하는 언행은

전적으로 자기 의지에 따른 겁니까?

그런데 그게 모두 ‘자유의지’의 결론이요, 결과입니까?

자유의지는 모두 자신의 지성과 함께 일합니다.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에 새겨져 몸으로부터 나오는 의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편의상 임시로 ‘생명의지’라고 불러보겠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잘못된 지식과 추론에 의해 잘못을 저지르는 쪽으로 발휘될 수 있다면

생명의지는 어떨까요?

종의 경험(유전자에 새겨진)이나 개체의 경험(자기가 감각으로 직접경험하거나, 타자를 통해 듣거나 엿본 간접경험까지)이

어떤 오류를 전달해 줄 공산은 없을까요?


배운다는 건 의지를 통제하는 것에 다름아닙니다.

나에게서 비롯해, 나를 도구처럼 써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내가 책임지지 않을 도리는 없거니와

내가 하는 일을 도시 ‘내 뜻’이라고 하자면 한 번쯤은 내 생각을 거쳐야 할 터인데

도무지 그게 기억나지도 않고 스스로도 해명되지 않는다면

책임을 진다는 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요.


배운다는 건 멈추는 능력을 주고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그건 넓게는 사회 관습이나 본능적 두려움을 포괄합니다.

‘그냥’ 그런 것들을 관조해서

‘그냥’이 아니게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 점이 여러 점, 긴 선으로 나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선택지를 갖게 됩니다.

‘선택’할 수 있어야 ‘자유’로운 행위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외부의 간섭, 압력뿐 아니라

자기 안에 축적된 자동반응을 멈추고

그것들을 검토하는 실제의 일, 가능케 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이 일할 때,

우리는 현상적으로 ‘멈춤’ 상태이고

이 멈춤이 가장 활발한 <자유의 시간>입니다.


그대는 하룻동안 몇 번이나 자유의 시간을 갖습니까?

다른 사람이, 책이 가르치는 것 말고

스스로가 실제로 ‘배우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길이는 내버려두고 횟수로만 헤아린대도 그게 몇 차례나 됩니까?


자유로우십시오.

그때마다 우리는 배우고

배움이 누리려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때 자유는 어린이의 떼 쓰기가 아니고

무지한 자의 고집도 아니고

가여운 자의 아집도 아니게 됩니다.

그대의 자유는 모두의 지지와 응원을 받는

공의로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멈춤의 시간을 갖게 되는 걸까요,

의지는 어떻게 성장하는 걸까요?

다음 이야기를 방금 정한 것 같군요.


나무에게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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