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달빛독서

대서양과 태평양만큼 먼 두 명의 금요일

by 이제월



다니엘 디포가 쓴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브라질에서 아프리카로 가려다 난파된

영국인 로빈슨 크루소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어요.

그가 난파당한 섬은 대서양 어느 곳에 있지요.

미셸 트루니에가 쓴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제목처럼 난파당한 섬이

태평양의 한 곳이고, 역시 영국인 선원 로빈슨 크루소가 주인공이지만

두 소설에서 영국인 작가가 쓴 작품에서는

섬에서 만난 원주민을 프라이데이(Friday)라고 이름 짓고

프랑스 작가가 쓴 작품에서는 방드르디(Vendredi)라 이름 짓지.

뭐 둘 다 ‘금요일’이랍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사실적인 문체와 개인의 내면묘사, 근대적 자아의 탄생을 보여 주어

진정한 의미의 첫 영어권 장편소설로 평가받고

이후의 모든 작품은 좋든 싫든 그 영향권 아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다니엘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를 재해석했어요.

영국인이 상상한 영국인의 조난기가 당대에는(1719년 출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고

가슴을 부풀게 했지만

250년이 지난 뒤 프랑스인이 보기에는(1967년 출간) 좀 얼토당토않은 얘기로 들린 것 같습니다.

두 작품 속에서 후자가 그려낸 로빈슨의 모습이 보다 인간적이고, 사실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근대를 발명해 식민지에 수출하는 멋진 서양인의 모습은 아니게 되지요.

방드르디의 등장은 이를 가속합니다.

18세기 작품에서 프라이데이는 로빈슨 크루소에게 계몽되고, 철저하게 개화되지만,

20세기 작품에서 방드르디는 로빈슨 크루소에게 배울 건 배우지만 훨씬 더 우수한 자로서 뭐든 더 뛰어난 면모를 보입니다. 로빈슨은 방드르디로부터 많은 걸 배워 섬에서 살아날 수 있게 되고, 그뿐 아니라 더 행복해보입니다.


두 사람의 ‘금요일’은

정말로 대서양과 태평양 만큼이나 멀고 차이가 납니다.

근대의 자아, 주체의 확장이 결국은 제국주의로

낯선이를 ‘타자화’하고, 타자를 개척해 자기와 같게 바꾸는 ‘동일화’의 과정이라면

트루니에의 작품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리디라는 타자를 바라보면서

거꾸로 자신을 타자화하고 객관화합니다.

그리고 반제국주의의 질서를 내면화하고

파괴 대신 조화하는 법을 배웁니다.

마지막에 거대한 배가 섬에 닿았을 때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리드의 선택은

곱씹어 볼 만합니다.


두 개의 소설은 모두 독자를 몰입케 하는 매력을 가졌습니다.

영어와 프랑스어 두 원어로부터 번역하여도 그 매력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찰과 질문을 제공하고, 유머도 있습니다.

21세기의 독자인 당신은

18세기와 20세기의 거리를 어떻게 체험할지 궁금합니다.


대서양과 태평양에 던져진 인물들을 성찰한 두 편의 영화도 좋습니다.

윌리엄 데포가 주연한 <로빈슨 크루소>(1997년 개봉)는 소설 그대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톰 행크스가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는 2000년에 개봉했고, 대서양 대신 태평양에 조난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프라이데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스럽고, 감정이 벅차오르게 될, 아마도 관객의 눈물을 뽑아낼 ‘윌슨’이 있답니다.


지구가 하나의 별로 두 대양을 품는 것처럼

어쩌면 그대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도 두 작가의 두 가지 비전이 모두 자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토록 두 개의 마음이, 의견이 다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 매 그때 그때마다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입니다. 어정쩡한 중립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되어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떠맡기고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옳든 그르든 무언가를 선택할 것이고, 선택의 결과도 맛볼 것입니다.

두 명의 로빈슨 크루소가 어째서 한 명은

프라이데이를 만나고, 한 명은 방드르디를 만났을까

두 사람의 내면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십대를 통과하며,

혹은 삶의 그 어느 곳에서든 ‘사춘기’증후군을 겪고 힘들어하는

그 어느날의 그대가

미래를 내다보는 두 개의 신비경이 되어줄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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