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나무야

약함을 드러내기. 진화의 기적 그리고 고백에 대하여

by 이제월


시를 이야기하며 ‘폭로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폭로하는 성질은 시와 관련할 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물종, 그러니까

호모 속(屬, genus)*의 특성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먼 조상은 나무 위에서 사는 작은 원숭이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주 커다랗고 예외적인 특성을 가졌는데, 그건 ‘커다란 눈동자’입니다.

소나 다람쥐, 알고 있는 어떤 동물이든 떠올려 보십시오.

대개 눈동자 즉, 눈알(안구眼球)에서 빛을 수용하는 어두운 부분(검은자위)이 흰자위보다 커서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는지, 무엇을 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부 상위 포식자의 경우, 눈동자가 작기도 합니다. 사냥감이 사냥꾼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리 없다는 걸 생각하면, 동물들은 서로에게 눈을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 눈길을 어디로 향하는가 드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동물계에서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인류의 눈동자가 크다는 건 ‘흰자위’가 커서 시선을 들킨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인류는 그러니까 생존경쟁에서 경쟁자에게 자신을 ‘들키는’, 자기를 ‘폭로하는’ 쪽을 택한 겁니다. 자기가 무얼 보는지, 무얼 신경 쓰는지 드러내고 알려 줍니다. 예컨대, 저쪽에 내 새끼가 있는데, 저기 내가 감춘 식량이 있는데, 아, 지금 나는 오른쪽 발이 다쳐서 아픈데 등 중요 정보를 암시 또는 명시합니다. 충분히 추측 가능하고, 충분한 위험을 유발하는 이 ‘시선의 들킴’은 도무지 생존에 백해무익해 보입니다.

여기서 생태계에서의 색다른 시스템이 출현합니다. 그것을 저는 ‘신뢰 시스템’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신뢰 시스템’은 곧 ‘협력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공유함으로써, 말하자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상대에게 헌납함으로써, 상대의 선의에 자기 안위를 맡김으로써 인류는 죽을 수도 있지만, 산다면 ‘팀’이 되고, ‘동료’가 되게 됩니다. 원피스에서 루피가 “너 내 동료가 되라!” 하고 외치는 것처럼 멋이 철철 넘쳐흐르는 방식은 아니지만, 넌 내 편인 거지? 너를 믿어도 되겠지? 아, 몰라, 난 너 믿을 거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약함을 공유하고 타자가 자기를 지키게 함으로써, 서로가 돌보는 집단, 동료관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인류는 개체가 필요한 온갖 것을 다 갖추는 대신 한정된 자원을 일부 능력에 몰아 쓰고, 나머지는 이웃의 선의와 호혜 관계에 맡김으로써 고효율의 집단을, ‘탁월성’을 갖는 비대칭한 사회를 형성합니다.

위험하지만, 성공하면 엄청 큰 유익을 가져오는 겁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 어차피 혼자 힘으론 어렵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터무니없는 힘의 배가(倍加, power up).


우리는 약함을 강점으로 바꾸었습니다.

진화의 기적이라고 부를 만하지 않나요?

그대의 약함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음, 용기 있고 정직하다는 전제 위에서 부끄러워해도 되고 두려워해도 되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냄’은 상대에게 나의 진실함을 전하고, 메시지를 강화하니까요. 오히려 좋네요.

그래서 약함을 드러내는 건 위험한 고백인 동시에 황홀한 초대입니다.

호모 속의 사피엔스 종은 특이하게도 자기 약함을 나눔으로써

거대하고 강력해졌습니다.

협력이 가능하고, 협력을 지속적으로 진화시켰습니다.

우연을 줄이고 필연을 늘렸으며, 하나의 힘이 전체의 힘이 되고, 전부의 힘이 하나를 위해 쓰이게 하였습니다. 생명의 역사에서 다세포 생물이 출현하고, 기관(器官, organ)을 출현시킨 것만큼이나 혁신적인 일입니다. 연합하여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협력보다 더 고차원이고, 더 유연합니다. 이제 나는 내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나를 벗어나서 숱한 남, 이웃들에게도 있게 된 거니까요.

배우는 자는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부끄럽지만 드러냅니다. 도움을 청합니다. 감사하고, 자아의 경계를 확장합니다. 어쩌면, 이 끝에는 더 큰 자아, 신이 있지 않을까요? 예람이는 결국 신화(神化, deification)할 겁니다. 미리 신명(神名)도 하나 지어 두세요.





나무에게

바람이





*생물분류는 큰 것부터 더 작고 구체적으로 분류하는 방향으로 계(界) > 문(門) > 강(綱) > 목(目) > 과(科) > 속(屬) > 종(種)으로 구분합니다. 계 위에 역(域)을 두기도 하고, 아래에 아종(亞種)을 두는 등 사이에 여러 세부 분류를 두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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