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달빛독서

『숲의 생활사』 같이 읽기. 장엄과 소박은 하나다

by 이제월


저자 차윤정은 산림학자로서 『신갈나무 투쟁기』를 필두로 해서

여러 명저를 썼습니다.

자연히 그의 팬이랄까요, 환경이나 생태에 관심을 갖는 이들 중

학자가 아니라도 관심과 호감을 갖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4대강 추진본부 환경본부장’을 맡으면서부터

이름을 꺼내기 불편한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직책을 맡았다거나 아니면 그가 해당 사업에 찬성 입장을 표해서가 아닙니다.

감투를 쓰기 전 그는 사대강 사업을 맹렬하게 비판하던 이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부당하고 무익한 일인지에 대해 그가 한 비판은

과학적이면서도 시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던 차윤정 교수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주는 감투를 쓰고서 (불과 몇 달 사이입니다) 그의 입장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신갈나무 투쟁기』는 자연을 인간의 눈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으로 서술하지 않고도 아니, 그러하고서야 비로소 더 온전하게 서술함을 보여 준 책입니다.

2009년 10월과 2010년 4월 사이에 그는 강경한 반대에서

열렬한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그것이 그 판에서 생존하기 위한 것이었던지 정말 어떤 신념에 변화가 온 것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차라리 그가 처음부터 사업에 찬성했더라면 이렇게 입맛이 쓰진 않았을 테지만

그를 이해하기에 반년만에 뒤바뀐 두 인물 중 어느 쪽을 내가 ‘그’라고 지칭할지 혼동스러워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뒤 한 번 더 당황스러웠던 건 그가 이미 쓴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않던 책들로부터

같은 사람들이 등돌려 돌아서던 때입니다.

그가 기술한 것이 단순한 이념이라면 이제 그의 사상 전반을 의심한다손치더라도

그는 자연을 대신해 자연 편에서 바라본 것을 기술하였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사상가로서가 아니라 변호인, 대변자로서 활동했던 셈입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과 대중과 소통하는 과학 저술가로서의 역량 모두 우수하였고,

그점이 삼림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자연과 생명, 우주, 그리고 그 우주와 인간 사이의 일들을 상상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한들

그 영감을 준 일이 없던 일이 되지 않는데

더 나은 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 책들이 사장(死藏)되는 것으로 보여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숲의 생활사』는 ‘투쟁하고 공존하는 우리 숲의 사계’라는 부제처럼

치열하게 경쟁하나 끈끈하게 공존하는 한반도의 숲의 삶을

사계절에 따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기록인 동시에

보편적인 기술로서

이런 식의 서술은 다른 데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해부하고 골격을 살피던 데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

살아서 움직이는 곤충의 행동을 살펴 써 낸 『곤충기』(파브르 저)를 처음 본 독자들이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요?


『숲의 생활사』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견해를 들려주지 않고도

단지 사실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목격한 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만으로

독자는 감정과 사유가 촉진되고 나아가 일종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입니다. 물론 저자가 증명하려던 게 그것이 아닐 수 있지만

자신이 발로 뛰며 현장에서 관찰할 때의 심정,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하는 그 청명함을 나누고 싶었을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자가 어디까지 계획하고 의도했건 아무튼 이 책이 증명하는 바가

저자의 ‘의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전달받으면 ‘느낌’이 절로 일어나고

단단하면서도 높고, 활발한 ‘생각’이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라는 점에서

저자가 무엇을 의도했건

이 책이 가진 선물-성(膳物性)은 여전합니다.


사실 자체가 주는 교훈과 깨달음.

더구나 인간이 개입하여 인간의 말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사실을 전하는 데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사물에 깃든 신비(神秘), 자연이 품은 영성(靈性)이 드러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오랜 동안 품어온 궁금증을 어느 만큼 해소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가르쳐주는 이 없이 어떻게 배우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지금은 가르침도 많고, 외치는 소리도 많은 떠들썩한 시기입니다만,

그래서 배우는 일에 의문을 달고, 지루해하기도 합니다만

사실 가르침이 배움을 돕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아주 큰 도움이지요.

하지만 크나큰 어려움, 그리고 궁금함은

처음에는, 맨처음 배운 사람은 어찌하느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배웠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온전할 수 있을까요?


『숲의 생활사』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문장도 미려하고, 담백한 가운데 변화를 숨기고 있습니다. 이런 문장은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크게


이 책이 전달하는 아름다움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책은

책을 써서 무언가를 전하지만

책을 쓰며 전하려는 그 무언가를 훼손합니다.

거의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 위험을 잘 피해갑니다.

그 방법 또한 탁월합니다.

정직하게, 진실하게, 곧이곧대로 씁니다.

그러면 읽는이는 글쓴이가 주지 않은 것들을 귀신같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아주 정확하게 다 받아 먹게 됩니다. 그걸 다 알아듣습니다.

말로 몰라도 가슴에 뭐가 남아서 꿈틀꿈틀합니다.


저는 이 책이 묻히는 게 아쉽습니다.

뭔가 좀 억울하기도 합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혹은 있던 작가가

현실에서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도 아픕니다.

분한 마음이 애달픈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선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책을 읽어 보라는 권유입니다.


『숲의 생활사』는 하얗게 머리를 텅 비운 사람

가슴을 텅 비워 무감동한 사람도

배우고 익히게 해 주는 책입니다.

장엄(莊嚴, sublimity)과 소박(疎薄, simplicity)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걸 웅변해 주는 책입니다.


거대한 자연과 그 속에 있는 작은 것들에 대해

구체적 사랑이 싹 트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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