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물길

픽션은 어디까지 허용될까?

by 이제월

최근 영화 <F1: 더 무비>를 둘러싼 논란을 들어 보았나요?

걸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각적으로는 명품을 뽑아냈다더군요.

저는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찬사와 비평 모두 타당한 근거가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그냥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다 하는 건 아니고, 이런 일이 갖는 도식(圖式), 패턴(pattern)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화 예술이 다른 예술보다 사람들 입방아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건 영화가 어떤 문제를 가져서가 아니라 영화예술이 이 세계 속에서 향유되고, 더 많은 견해, 심지어 전문적인 비평가라면 갖지 않고, 가져도 드러내지 않을 ‘감정’과 ‘인상’, ‘주관적 취향’까지를 규제할 수 없이 허용되는 ‘대중’을 상대로 선보이는 예술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text)의 문제가 아니라 콘텍스트(context)의 문제.

이른바 ‘긁히는’ 것이 있고, 안 긁히는 게 있다는 겁니다.

어느 것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긁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개봉 당시에는 괜찮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거나, 혹평에 시달렸는데 사후 재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명실상부한 걸작의 반영에 올랐지만, 시간이 흘러 달라진 도덕적 잣대에 따라 윤리적으로 비난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픽션은 어디까지 사실과 다른 것이 허용될까?

실은 역사도 사실 자체는 아닙니다. 진실을 전하기 위해 발췌되고, 간추려진 역사는

사실의 그림자, 사실의 어떤 환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쓸모를 생각하고, 이야기가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기를 바라면 되지, 어떤 완벽한 이야기상을 미리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교조(敎條), 도그마(dogma)는 갖지 않아도 됩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의 한 장면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극중 퇴역한 장교인 프랭크 슬레이드는 시각장애인이고, 한 학생이 그를 돌보는 역할을 맡습니다. 찰리 심스는 크리스마스 때 집에 돌아갈 돈을 모으기 위해 추수감사절 기간 동안 슬레이드를 돌보게 되고, 괴팍한 그의 성미를 맞추면서 자유롭고 자신의 원칙을 가진 그를 통해 한편 배우고, 다른 한편 생에 더는 애착이 없던 슬레이드에게 품위를 돌려주는 역할도 [뜻하지 않게] 하게 됩니다. 이 중 슬레이드가 한 파티장에서 어느 젊은 여인에게 춤을 신청하고, 춤을 출 줄 모른다는 상대를 이끌며 춤추는 멋진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음악도 색상도, 움직임도 모두 좋지만 이 구체적이지만 추상적인 시퀀스를 완성해주는 명대사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Slade: No mistakes in the tango, Donna. Not like life. It's simple. That's what makes the tango so great. If you make a mistake, you just keep going. Why get all tangled up?


직역하자면,

슬레이드: 탱고엔 실수가 없어, 도나. 인생하고는 달라. 단순하지. 그게 탱고의 멋진 점이야. 실수를 해도 그냥 계속하면 돼. 괜히 엉키려고 하지 마”

이지만, 개봉 당시 간결하게 아래와 같이 자막을 띄웠었습니다.


“탱고에는 실수가 없어요. 인생과 달라요.

스텝이 엉키면, 그냥 계속 추면 돼요.



스텝이 엉키면, 그냥 계속 추면 돼요.

이 말을 저는 사랑합니다.


역사에서 우리의 실수는

우리가 인간을 사랑하고, 미래를 희망하며, 세계에 대한 책임의 윤리를 질 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역사의 오류, 역사 고증의 오류는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그게 매번 달라지기는 하지만

자체에 계속할 수 없게 하는, 거스르는, 막아 서는 요소를 정련하여 제거한다면,

언제고 재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콘텍스트를 만나고도, 호시절(好時節)에도 사랑할 수 없게 만들면 곤란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텍스트는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사는 콘텍스트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숨 쉬고,

그 안에서 순경(順境)이든 역경(逆境)이든 선택하면 됩니다.

선택의 책임을 지는 순간, 원하는 응답을 받지 않았다고 — 이를테면, 거절 — 누군가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조차.


아, <F1: 더 무비> 말이죠.

실제 대회의 팬에게는 불편하겠지만

다른 보통의 팬들에게는 판타지이고, 그 판타지를 확인하러 실제 대회로 관심을 돌린다면,

뭐, 괜찮은 일 아닐까요?

진짜 문제는 아마도 유사한 작품, 소재나 주제를 공유하는 다음 등장하는 어떤 작품이

이 작품의 긍정적 유산과 부정적 유산 중 어느 쪽을 계승하느냐가 아닐까 합니다.

그게 고약하면 이 작품도 나쁘게 연루될 것이고,

그게 훌륭하면 이 작품도 좋게 기억되고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오르내릴 겁니다.


역사는 그렇게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호출되고 호명되며

다른 일을 합니다.

무수한 해석의 지평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잇고-끊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유희요, 우리의 진지한 일이 될 때

우리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역사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마틴 브레스트(Martin Brest) 감독의 1992년 작품. 알 파치노(Alfredo James "Al" Pacino)가 주연을 맡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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