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나무야

함께하기. 시간의 윤리에 대해

by 이제월


아프리카 속담이라고 알려진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마 기원을 추적하면 딱 이 말은 아닐 거예요. 출전을 추적한 어느 분은 케냐 루오 족의 속담이 그나마 원형 같다고 추정하면서, “청년 혼자서는 빨리 달리고, 노인과 함께라면 천천히 가지만, 청년과 노인이 함께 가면 멀리 간다”라는 속담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보면 지혜와 패기, 경륜과 도전이 함께 하면 더 큰 성취를 낸다, 더 미래로 나아간다 등 해석을 확장할 수 있겠지만, 그냥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로도 울림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도 증명된 건 아닙니다. 누군가는 격언대로 해서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하기도 합니다. 어느 한 요소가 모든 걸 결정하지는 않으니 모자란 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잘 살린 누군가는 성공하는 동안, 누군가는 한두 가지에 의지하거나 거꾸로 여러 가지에 다 신경을 나누어 쓰다가 쓴맛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참 매력적인 끌림이 있지 않나요?

함께 가자는 말. 함께하자는 말. 거기에는 무언가 안심되고, 잘될 거 같다는, 그러면서도 어려울 것도 같다는 인상들이 뒤따르지 않나요? 이 한 무더기의 인상은 밑도 끝도 없는 막무가내? 아니면 어떤 근거나 이유가 있는 걸까요?

굳이 없음을 증명할 까닭은 없고, 없으면 없는 거지만, 있다면 그게 무얼까 상상해 봅니다.

함께 간다는 것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요? 왜 우리는 친구를 원하고 끌리는 걸까요? 이유가 없는 것 같을 때 이유는, 대개 생물학적입니다. 인간은 자기 몸에 모든 능력을 채우는 대신, 몸을 가볍게 비워 유동성을 높이고, 인간-들의 능력을 키우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나-와-너’를 한 단위로 묶고, ‘우리’라는 새로운 단위를 만들어서는 이 우리를 또 같은 방식으로 확장하고 연장합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검은눈동자를 줄여서 시선을 들키도록 진화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들켜서’ 우리가 됩니다.

그런데 얼마전 ‘시간을 도입’하여 사고하시라 당부하였지요.

네, 이 일도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시간을 써서 나와 너라는 분리된 주체가 우리라는 공동주체로, 공동체로 나갈 수 있습니다. 좀 덜 부담스럽게 말하자면, 파트너, ‘팀’.


시간을 들이는 건 윤리입니다. 나만 있는 세상에서 ‘너’를 향하고 가 닿는, ‘너와-함께’하는 세상에서의 윤리. 그 세계를 만들고 굴리는 원리.

그리고 우리는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지요. 우리가 시간을 쓰는 법은, [시간을] 기다리는 겁니다. 시간을 기다리며 시간을 쓰는 겁니다.

즉, 때가 오기까지 희망하며,

일을 같이 도모할 상대를 신뢰하며,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뿐.


이 기다림이, 우리를 함께이게 합니다.

함께인 우리는 나와 너의 단순합을 능가합니다.

나도 할 수 없고, 너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냅니다.

세상 모든 것을 그대와 한 팀으로 만드세요.

피조물이 지니는 최고의 권능을 누리세요.



나무에게

바람이





*참조: https://brunch.co.kr/@theafricanist/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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