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힌사/아힘사(अंहिसा)와 사티아그라하(सत्याग्रह) 새기기
인도 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아마도
인사말 “나마스테”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나마스카람’도 같은 뜻으로 거의 같은 빈도로 쓰이지요.
인도에 좀 더 관심을 갖는 사람이면 이것저것 다른 말들도 알아질 텐데
그중 특별한 말을 하나 꼽자면 “아힌사”를 꼽겠습니다.
아힌사는 ‘아힘사’(Ahimsa)로도 읽는데, ‘히’ 자 밑에 이응인지 미음인지 모르게 써 놓으면 그 발음이 나온달까요. 원문은 अंहिसा 입니다.
이 말을 번역한 걸 보면 흔히 ‘비폭력’으로 적지만 그보다 ‘불살생’ 또는 ‘해치지 않아’가 더 정확하게 뜻을 옮긴 것입니다.
살림 지식 총서가 짧은 분량에 알차게 이야기를 전하곤 하는데,
이정호 저자가 쓴 아래 책은 생각할거리를 푸짐하게 던져 줍니다.
『아힌사』(부제: 인도의 불살생 전통과 비폭력 사상)
불교에 자비가 있고, 그리스도교에 형제애가 있다면
힌두정신에서 정수라고 손꼽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것이 모두의 삶을 규율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충효예신을 떠들어도 그게 모두에게 해당하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그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가치요 준칙이라는 점을 말하는 겁니다.
해치지 않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그러다가 나만 호구 잡히는 건 아닐까요?
현대인들에게 아힌사를 강렬하게 새겨 준 인도의 사상가요 실천가 간디는
사실 사티아그라하/사티야그라하(Satyagraha, सत्याग्रह)로 더 유명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사티아는 ‘진리’를 말하고
‘그라하’는 열정을 바치는 것, 수고하는 것, 노력하는 것, 간절히 원하여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일 수도 있고, 진리를 꼭 찾겠다는 분투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널리 퍼진 번역은 한자어이긴 하지만 ‘진리파지’(眞理把持) 같습니다.
진리를 꽉 쥐고서 결코 놓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찾아서 지킨다는 말.
연인이나 군인의 맹세 같지 않나요?
그런데 이 말의 뉘앙스는 실은 좀 다르답니다.
힌디어 전문가인 이정호 저자와 결은 다르지만
법학자이자 어느새 아나키즘에 대한 깊은 연구로 알려진 박홍규 저자는
간디에 대해 여러 책을 저술하고 번역하였는데
가장 최근에는 그의 간디 연구의 결정판으로 보아도 좋을 『간디 평전』을 냈습니다.
이 책은 <문명에 파업한 비폭력 투쟁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사티아그라하를 ‘파업’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택한 번역어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라하는 꽉 쥐고 있는다는 정태(靜態)가 아니라
그걸 놓게 하는 모든 것을 부단히 거부한다는 강한 동태(動態)를 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폭력’이지만 ‘투쟁가’입니다.
싸움의 방식이 다를 뿐 싸움꾼입니다.
간디가 평화를 사랑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며,
일단 틀리면 죄다 틀리고 맙니다.
간디가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키려고 했다고요?
아닙니다. 간디는 ‘부당한 지배’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키려고 했습니다.
즉, 참이 아닌 것, 진실하지 않은 것이 지배한다면
영국이 물러나도
인도인이 인도라는 나라를 운영해도 똑같이 간디는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한이 분단하여 각기 단독 정부를 구성하는 데 반대하였듯이
간디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적대자로부터 독립하는 걸 추구한 게 아닙니다.
사실 그런 이들은 이기는 게 목적이라서 하다 하다 안 된다 싶으면
기꺼이 변절해서 반대편에 가 붙기도 합니다. 거기가 이기는 편이다 싶으면.
그러나 이들은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행하고 싶었고
물론 성공하기를 바라고 고심하고 분투하지만
설령 실패하더라도 올바르게 하다가 실패하는 것을
가짜 성공보다, 타협한 것보다 더 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경과를 인정하기는 하고
이것이 또한 이런 인물들에게서 보통사람들이 모순을 발견하거나
흠집을 찾고 벌리는 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과뿐 그들은 최종 목적지를 향한 도정에 오른 것이요
그것을 계속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계속하는 중에 중간단계를 받아들이지만
저 분단의 반쪽짜리 독립 같은 ‘결정단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간디는 여동생의 성폭행을 막기 위해 비폭력으로 강도의 마음을 바꾸고 동생을 지킬 수가 없다면, 즉, 빛의 에너지가 근육의 물리력보다 강하지 못하다면
물리력을 행사해서 동생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이건 그가 자신을 찾아온 어느 청년에게 직접 건넨 이야깁니다.
자신을 존경한다고 어떤 경우라도 ‘아힌사’를 실천한다고 — 아마도 칭찬받기를 바라고 — 자랑스럽게 다짐하는 그를 꾸짖으며 한 말입니다.
시몬 베유(Simone Weil)의 사후 출간된 『중력과 은총』에도 이 일화가 담겨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비폭력을 외친 투사는 어째서 폭력을 권하는 겁니까, 그토록 단호히?
내가 아힌사를 실천하는 통로인 것 또한 중요하지만
그러느라 다른 힌사(해침)을 방조하는 것은 아힌사가 맞을까요?
그가 신체적 힘을 행사해서 강도를 제압하고 동생을 구하는 경우와
그 자신이 폭력을 쓰지 않고 강도가 폭력을 행사하게 하는 경우 중
어느 쪽의 힌사가 더 클까요?
어떤 힌사가 더 부당한가요?
어쩌면 불교 전통의 두 갈래,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차이가 이런 것일 겁니다.
소승은 혼자 타고 가는 미니카이고,
대승은 버스나 비행기나 큰 배에다가 모두 태우고 가는 겁니다.
소승, 힌사를 버리는 아힌사의 실천을 탓할 수야 없지만
커다란 힌사가 벌어질 때 아힌사 타령을 하는 것은 과연 아힌사가 맞는 걸까요?
그런 게 사티아이고, 그런 사티아를 힘껏 그라하하면 되는 걸까요?
그렇게 쪼개져 굴러다니는 사티아가 있을까요?
그건 탐욕스런 사람이 자기 보석을 지키려고 모두를 해치는 것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요?
사티아는 말하자면 낱낱의 사티아들이 모두 이어져 온 사티아를 이루고 있기에
온사티아의 일부인 한에서만 낱사티아일 수 있는 것이 아닌지요?
아힌사와 사티아그라하를 풀이하는 여러 저작을 찾아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우리의 불편이 불편이 아니며
우리의 희생이 희생이 아니며
우리의 정의가 정의가 아니고
우리의 평화가 평화가 아닌 줄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생각하면,
더는 남의 것을 받아 읊는 재생(再生, replay)를 멈추면
우리는 행위요, 놀이, 경기를 시작할 겁니다(play).
재생하지 말고
생생(生生)하세요.
거기에는 올바른 목적과
올바른 방법
둘 다 필요합니다.
아힌사와
사티아그라하는
올바른
목적과
방법의
강력한
후보라
생각해요.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