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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공동선을 지향하기

by 이제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용하거나 들어본 적이 있는가요?


요즘은 검색하면 금방 확인할 수 있지요.

사회적 책임과 높은 도덕성, 공공정신 등으로 구성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한마디로 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의무들입니다. 고결한 자에게 부과하는 의무.

높은 지위나 부를 지닌 이들이 이런 의무를 수행할 때

그 사회는 상호신뢰로 통합을 이룰 수 있고

통합한 사회의 결집된 힘은 발전과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같은데

서로가 안심하고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실제로 이게 잘 작동하느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에는 ‘외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를 통합하는 원리가 외부와 부딪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물론 더 잘 교육받고 더 튼튼하게 자란 사람들이

외적과 맞설 때 그것이 외교의 차원이든 전쟁으로 번진 경우든

더 잘 대응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혜뿐 아니라 용기를 요구할 때

— 그리고 이런 상황은 일어날 수 밖에 없거니와 —

문제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내부를 통합하는 강력한 원리, 노블레스 오블리주, 달리 말해서 솔선수범, 본보이기는

존경과 신뢰, 그로 인한 단합과 갈등 조정 능력 등 평시에 유리한 점이 더 많지만

외부와 충돌할 때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수행할수록 질병, 장애, 사망을 입고 당할 위험을 키웁니다.

실제로 번성했던 로마는 원로원 가문의 구성이 변화무쌍했는데, 여러 조사에 따르면

로마 귀족 가문이 ‘대가 끊기는’ 주기가 평균 3~4대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100년 내외에 지나지 않는 기간입니다.

정쟁에 의한 몰락이나, 고대의 의료와 위생 수준에 의해 질병으로 대가 끊기기도 하겠지만

묵과해선 안 되는 이유가 ‘전쟁으로 인한 사망’입니다.

그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결과는 가문의 몰락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이렇게 최선의 도덕이 사회의 안녕을 보장하는 만큼 개인과 사사로운 집단의 안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높은 도덕성과 실천은 한 사람이 어디 학원 다녀온다고 형성되는 게 아니라 수대에 걸쳐서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우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올바른 판단력은 물론이고요. 그리하여 발생하는 문제는 ‘사라지는 지도층’의 공백을 ‘새로운 지도층’이 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도층에는 ‘더 낮은 도덕성’을 지닌 집단이 진입하고, 장기화하면 그들로 대체됩니다.

말하자면 ‘선의에 기대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보조재가 있을 뿐입니다.

공적인 보상. 명예와 존경, 그리고 사회가 힘 닿는 데까지 후손이나 남은 이들을 대우하는 것. 죽거나 다친 이를 대신해 돌보는 것이 있습니다. 흔히 ‘보훈’이라고 하지요. 이건 문화도 문화지만 ‘법과 제도’의 영역입니다. 강제해야 합니다. 외부에서.

그러나 집단으로 볼 때 더 큰 보완재는 ‘교육’입니다. 이는 법이나 제도와 다르게, 법과 제도를 통로로 삼을 때조차 ‘문화를 내면에 심는’ 과정이며, 내면에서 피어나 외적 강제나 간섭 없이 ‘내부에서 강제’되는 것입니다. 강제란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내부에서 자율’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하늘에 별이 총총 떠 빛나는 것처럼 땅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빛난다고 했거니와, 이때 그가 말하는 자유는 멋대로 하는 무절제가 아니라 고도의 절제, 명철한 지성과 굳세고 높은 의지, 민감한 감성에 의해 ‘길을 찾고’ 자신이 찾은 준칙을 지키는 ‘자율’, Autonomia(아우토노미아)입니다. 법과 계율인 노모스(Nomos)가 형태를 띠고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서 신체기관처럼 자연스럽게 숨쉬고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최고로 자유로운 자는 최고로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것.


칸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그의 <영구평화론>을 알고 있고, 영구한 평화를 위하여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을 잇달아 만들어 시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여러 도전에 직면하였지만, 평화 체제는 경쟁 체제보다

각각의 부분 사회, 각 나라에게도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각 나라가 내부 붕괴를 겪지 않으려면 어떤 형태로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그들의 시도는 궁극적으로 약자보다, 빈자보다 <더 높은> 무엇(도덕성 즉, 지와 행의 합일, 공적인 법과 문화의 대행, 솔선수범)을 요구받고 응답하는 것일 터인데, 이것이 외부와의 강한 충돌이 될 때, ‘전쟁’이라는 신체 훼손과 재산 파괴, 죽음과 [심신 어느 쪽이건] 장애를 포함하는 수단을 포함할 때,

안에서 좋은 것이 밖에서는 나쁜 것이 되는 일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한 개의 선은 다른 선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선은 더 높은 선, 공동선을 추구하고 그 안에서 조정되어야 합니다.


인류는 계속 이 문제를 다시 묻고, 다시 답하는 노정 위에 서 있습니다.

역사는 이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재정의되고, 구성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냥 복잡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순과 부조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고

명백한데, 살아 있기 때문에

도면 위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꿈틀대는 진짜로 있는 것익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그대는 그저

감각을 열어 느끼고, 관찰하고, 숙고하고, 상상하며

이를 홀로 하지 않고 열어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면 됩니다.


먼 데 있는 이, 심지어 시공간을 떨어뜨린 상대라면

‘읽고 쓰고’ 함으로써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읽고 쓰고 이야기함으로써 역사를 이었고

역사를 이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공동의 선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은 발화자의 뜻에서 더 확장해서

역사란 언제나 어느 상화에서나 대화라고

함께 하는 뜨개질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상대를 적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상대의 선익을 함께 생각하십시오.

말하자면 내 꺼 네 꺼로 대립하는 대신

우리 것을 만들어 봅시다.


우리들, 사피엔스는 <늘 이 한 문제>만을 풀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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