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달빛독서

이원수 시 <햇볕>

by 이제월


햇볕은 고와요 하얀 햇볕은

나뭇잎에 들어가서 초록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가서 꽃빛이 되고

열매 속에 들어가선 빨강이 돼요


이원수 선생님의 시 <햇볕>의 첫 연입니다.

백창우 씨가 가락을 붙여

굴렁쇠 아이들과 함께 부른 노래도 있지요.


이 노래의 2절이자 시의 2연은 이렇습니다.


햇볕은 따스해요 맑은 햇볕은

온 세상을 골고루 안아 줍니다

우리도 가슴에 해를 안고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되어요



햇볕은 곱습니다. 어찌하여 곱습니다.

무슨 색깔이길래 그리 곱다고 합니까.

그것은 색깔이 아닙니다. 색 중에 색 아닌 색 둘이 있는데

하나는 검정이고 하나는 하양입니다.

흰빛은 어떤 빛깔이 아니고

갖은 빛이 빠짐없이 들어선 덩이입니다.

이 덩이는 분광기(分光機, spectrometer)를 거치면

무지개빛 가시광선들과 보이지 않는 양끝의 적외선과 자외선까지를 흩뿌립니다.

이 빛들이 다 모이면 흰 것입니다.

희다. ‘하얀 소복’(素服)이라 할 때, 희다는 건 바탕이요 본래의 것이거니와

알파요 오메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것은 물감을 부어 만든 흰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인 것, 본래인 것을 말합니다. 이 바탕이 모든 게 됩니다.

우주 빅뱅의 한 점처럼.


하얀 햇볕은 곱습니다. 하지만 왜?

어째서 곱다는 걸까요?

시인은 이어서 노래합니다.


나뭇잎에 들어가서 초록이 되고


초록은 무엇입니까. 풀빛입니다.

풀이 내는 제 빛깔이 풀빛입니다.

그것은 저 하얀 햇볕을 받아 난 색입니다.

풀이 무엇을 받아안고 무엇을 물리쳐 내뱉는가에 따라

풀의 것은 풀에게 남겨두고 풀이 버린 것을

밖으로 내어 풀빛, 초록이 납니다.

흰빛은 풀이 정하는 대로 자신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봉오리에 들어가서 꽃빛이 되고


봉오리에 들어간 햇볕은 이제 꽃빛을 냅니다.

이 따스한 볕은 가는 데마다 저마다 제 본성을 드러내게 돕습니다.

남들이 그를 알아보게 해 줍니다.

재세이화(在世理化). 단군신화에서 홍익인간에 붙은 말입니다.

세상에 있으면서[같이 살면서] [같이 사는 이 곧, 이웃존재들이] 이치대로 되게 한다는 말.

참 곱습니다.

어찌 설득해서 내 뜻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이이는 이이대로, 저이는 저이대로 저답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저마다의 ‘되기’가 완료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것이 본래의 이치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얀 햇볕은 봉오리에 들어가서는 꽃빛을 이룹니다.

빛을 낼 그것은 그이 안에 있겠으나

비로소 빛을 주는 것은 하얀 빛입니다.

스스로는 어느 것도 아닌 빛.

낮에는 하얗고 밤에는 검은.


열매 속에 들어가선 빨강이 돼요


열매 속에 들어가서는 빨갛게 익은 빛을 내어 줍니다.

하루 이틀 사흘……서서히 때가 무르익음을 표시해 줍니다.

빛은 저에게도 남에게도

온세상에

때를 알립니다.

생명이 순환하는 주기를 알려 줍니다.


보이지 않는 햇볕, 하얀 햇볕은

흰 것, 높은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보다 높고 오랜 것이지요, 머리는 더 희어지지요.)

하늘[天].


나뭇잎이며 봉오리며 열매는

있는 것, 보이는 것, 본래 그대로인 것들입니다.

실물(實物), 현실.

땅[地].


그리고 만남이 주는 색깔들

초록, 꽃빛, 빨강 들은

만남이요, 마주쳐 느끼고 생각함이요

어울림이요 일함입니다.

이것은 사람.

사람이 맺는 관계, 사람-살이입니다.

사람[人]


이 셋은 그러나 또 따로가 아니고

나누어 볼 수 있을 뿐 하나입니다.

순서랄 것도 없이 하나로서만 나타납니다. 생기[生起, arising]합니다.

이 인연생기 전체가 하나의 이치, 내용이요 형식, 장식이 아닌 자기존재의 갖춤이니, 온전한 스타일

천지인삼재(天地人三才)입니다.


아이들 읽으라는 동시가 깊은 뜻을

세상 만사가 움직이는 이치, 삼라만상을 이루는 이치를 보여줍니다.

뜻 또는 힘이

몸들과 마주쳐 비로소 본성을 드러낼 때

이 뜻/힘과 몸과 비침이

어긋나지 않고 하나인 것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즐겁게 기꺼이 이 모든 걸 받아 누립니다.

그 속을 뛰어노는 우리도

제 빛깔을 지닙니다.

하루 종일 찬란하게 변화합니다.


시의 1연이 이처럼 세상이 ‘있다’는 선언이라면,

이러니 시의 2연은 당연히 본 것처럼


햇볕은 따스해요 맑은 햇볕은

온 세상을 골고루 안아 줍니다

우리도 가슴에 해를 안고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되어요


라고 노래합니다.

하얀 햇볕, 색을 베푸는 햇볕은

맑습니다.

거기에 다른 거짓이 없습니다.

보이는 그대로이지요.

그 볕이 온 세상을 골고루 안아 준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도 그 세상의 하나이고

이를 노래하고, 빛과 몸이 만나는 뜻을 헤아려 노래할 줄 아는 이들이니

가슴에 해를 안는다 하는 것이며

그랬을 때,

빛깔 없는 마음은

내적인 빛깔을 띱니다.

따뜻한 사랑의 마음.


이제 그대도

다른 누구의 빛을 찾아줄 것입니다.


따뜻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이치를 안다면

우리 마음도 따뜻할 것이니까요.


그대는 작은 햇님

이땅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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