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

생각은 ‘실행’이다 — ‘치료’다 (2) 프락티코스

by 이제월



철학(哲學)은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의 번역어라 했습니다.

철학이 필로소피아, 그러니까 철학이라고 부르는 화관(花冠), 이름을 받기 전에

그것은 무엇이라고 불리우고, 무엇이라고 생각되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프락티코스(πρακτικός)는 동사 πράσσω(프라쏘, prássō)에 형용사형 어미 -ικός(이코스, -ikos)를 붙여 만들었습니다. πράσσω는 ‘행하다, 실행하다’는 뜻입니다. -ικός는 ‘~에 관한, ~한 성질을 가진’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프락티코스는 행동하고, 실천하고, 실행함을 가리킵니다.

파생어로 πρακτικόν(프락티콘, praktikón)은 ‘기록, 회의록’ 또는 ‘실천적인 것’을 뜻하는데, 이는 기록이란 게 결국 실제의 행동, 주관적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공통세계에서 실제로 행한 것, 실제로 벌어진 일에 관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프락티코스의 반대말은 θεωρητικός(테오레티코스, theōrētikós)로 ‘관념적인, 이론적인’이라는 뜻이지요.


현대 영어의 practice는 훈련이나 매뉴얼, 절차, 과정 또한 뜻하는데 고대 그리스 세계와 중세 라틴어에서도 이미 이런 뜻과 쓰임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학은 어째서 프락티코스라고 불리었을까요.

고대인들이 프락티코스를 할 때, 이것이 보여지는 것을 보는 ‘인식’을 가리키지 않고

스스로 보는 것, 재구성하는 것, 구성의 이치를 관통하여 성찰하는 것, ……. 그러니까

실행-하는-사고를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치료’라고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고, 사태를 해소하고, 상태를 변경하는 것이었으니까요.


달리 말해 허망한 헛소리는 철학이 아니다, 말장난이나 개소리는 애초에 집어치워야 한단 얘기이지요.


우리는 친구와의 대화, 혹은 아무나하고라도 대화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현실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치 대화하듯 혼잣말을 하기도 하며

주거니 받거니 사고를 전개합니다.

우리는 ‘대화’하는 존재가 되면서 더는 짐승과 같이 묶을 수 없게 분리된 것입니다.

혼자일 때조차 혼자가 아닌 존재. 그리하여 인간(人間)인 우리는

끊임없는 타자-되기와 타자-와-만나기를 통해서

자신을 육체에 가두지 않고

육체를 타되, 정신으로 서로 연결되어 더 큰 집단 속에서

지혜를, 가치를, 감각을 공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고

미해결의 길거나 짧은 ‘경과’를 차근차근 풀어냈습니다. 견뎌냈습니다.

한 번에 할 수 없는 일을

여러 번에 걸쳐, 잇고, 잇고, 또 이어서 풀어갔습니다.

마침내는 대를 이어서

마침내는 적과, 일면식도 없는 존재와도 마주치지 않고서조차도 참여시키면서.


그것을 담은 언어가 생각을 옮길 때

서로 적대하고 반목하던 이들이

신뢰하고 존경하는 경험을 하며

멸시하던 이를 존중하고 애정하며

이렇게 더 큰 자아로, 개체에서 보편적 차원까지 사고를 확장하고 심화합니다.


생각은

단순 인식에서 나아가

자기 실행이 되고 자기 수행이 되며,

거기서 더 나아가

공동 실행이 될 때,

자연과 또 이웃과 또 다른 누군가, 무엇과 함께-하는

공동의 실행으로서

우리의 삶을, 인식을, 구체적인 처지와 관념의 토대를

변경하고 ‘치료’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작가의 이전글예람이에게 | 나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