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나중에 읽을 책 — 유리(羑里)에 대해 | 『죽음의 한 연구』를 위해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는 1970년대, 아니, 한국문학이 생산한
가장 특별한 생명체 중 하나입니다.
『죽음의 한 연구』는 <생사>라는 부제를 달아
<고행>이라는 부제를 단 『칠조어론』과 <해탈>이라는 부제를 단 『잡설품』(雜說品)으로 이어집니다만, 우선 셋 중 그나마 분량이 적고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죽음의 한 연구』(한 번도 고쳐 쓴 흔적이 없는 2700매 가량의 원고지에는 애초 <죽음의 연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지만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여 최종 출판케 되었습니다)를 먼저 접하기 바랍니다. 그런 뒤 『칠조어론』을 읽고, — 저는 이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어렵고 높은 과제였습니다만 — 그 뒤 아직 저도 시작하지 못한 『잡설품』까지도 가 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바람과 요청은 한참 뒤에 응답하시면 됩니다.
그럼 그때 가서 이야기해도 될 것을 왜 지금 이야기하느냐, 하면
생사각(生死覺)은 나이를 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혹 나이에 무언가 달린 것처럼 믿고 말하는 분들도 많이 봅니다만, 다른 건 몰라도 생사에 대한 깨우침은 연령의 고하가 상관이 없습니다. 나이 먹어도 철들지 않고 두려움에 갇힌 이도 있고, 나어려도 관조하고 깊이 꿰뚫는 이도 있습니다. 저는 일곱 살,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을 만나 꼬박 사 년을 동행하는 복을 누렸는데, 그 아이들이 여덟 아홉 살이 되어서는 스무 살 대학생이나 일흔의 노익장을 만나 겨루던 대화 이상으로 팽팽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 나이에 부족한 건 깨달음의 이차 지식이 아니라, 주로 용어에 해당하는, 긴 이야기를 한두 마디에 담아 건네는 용어들, 그 일차 지식의 부족함입니다. 이 관문에 걸려서 못 나아가기도 하지만, 있고 없고에 매이지 않고, 형체에 눈을 빼앗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도 본질을 매만지고 다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그토록 허허(虛虛)로울 때, 공활(空豁)할 때, 공즉시색이며 색즉시공이며 하는 것들이 걸리지 않을 때 그냥 슥 펴서 슥 읽으면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이야길 참 길게도 썼구나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한 글자가 걸리면 그때부터는 공부하고 수양하듯 하지 않고는 이 생사관(生死観/觀)의 생사관(生死關. 관문의 뜻으로)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책은 직접 읽지 않고 해설하는 게 유익할 게 없어서 저는 주인공이 뛰어들어 40일 고행하는 세계, 유리(羑里)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는 데서 할 일을 마치겠습니다.
유리는 지명입니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등장하지요.
《史記》의 「본기」에서 「주본기」(「本紀·周本紀」) 절에 해당 명칭이 등장합니다.
崇侯虎譖西伯於殷紂曰:「西伯積善累德,諸侯皆嚮之,將不利於帝。」帝紂乃囚西伯於羑里。
숭후호(崇侯虎)가 상(商)나라 주(紂) 임금에게 서백(西伯, 즉 주 문왕 姬昌)을 모함하며 말하길,
“서백은 쌓인 선덕이 많아 제후들이 모두 그를 따르니, 이는 임금을 위협할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주왕은 주 문왕을 유리(羑里)의 감옥에 가두었다.
西伯蓋即位五十年。其囚羑里,蓋益《易》之八卦為六十四卦。
서백(주 문왕)이 즉위한 지 약 50년쯤 되었을 무렵, 그가 유리에 포로로 잡혔다.
그곳에 갇힌 동안, 그는 《주역》(周易)의 원래 8괘를 기반으로 하여 중첩(重卦)을 통해 64괘를 만들어 냈다고 전한다. *
— 《사기史記》 권사卷四〈주본기제사周本紀第四〉
주나라 문왕이 상나라 왕실에 의해 이곳 유리에 7년간 감금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일치하는 장소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돼 방문 가능한 곳입니다. 문왕은 여기서 주역의 이치를 깨치고 개량하였거니와 이를 『문왕계역』(文王繫易)이라고 부릅니다. 이 일로부터 유리(羑里) 감금은 ‘고난 속에서 지혜를 연마’하는 이야기의 대표가 됩니다. 그리고 유리는 역경에 관련한 성지로 대접받고 있습니다(역학박물관이며 유리성, 문왕묘 등이 조성돼 있다고 해요).
독서는 고뇌입니다.
고뇌하지 않는 독서는 반쪽짜리, 반푼이입니다.
즐겁게 읽더라도 고뇌해야, 머리속에서 또 가슴속에서 고뇌하며 다시 읽어야 제대로 읽은 겁니다. 그렇게 읽는 일은 읽지 않은 말들을 동원해서 처음에는 누덕누덕 깁듯이 힘겹게 전개하지만 어느 틈에 녹아서 실이 되면, 이 말의 실들을 자유롭게 누비어 고운 천을 짜고, 마침내 때에 맞게 원하는 대로 필요한 옷을 짓게 됩니다.
읽기는 결국 ‘쓰기’라 이 말입니다.
모든 읽기는 쓰기로서 마감되고,
쓰기 또한 읽기로서 마감됩니다.
그러니 읽은 것을 쓰고
쓴 것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난해함이 난해함이 아니라
살아감일 뿐이란 걸 알 것이고
궁즉변, 변즉통(窮則變,變則通).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는 주역 계사전의 말을 실현할 것입니다.
어려운 건 없습니다.
삼킬 용기, 용기를 만용이 아니게 할 정직함이 요구될 뿐입니다.
休
*蓋는 ‘개연성’이라고 할 때 그 ‘개’ 자입니다. Probably. ‘아마도’ 그러할 것이라고 ‘추측’함을 가리킵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아마 그럴걸, 하는 이야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