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물길

우리는 우리가 탈 피스메이커를 고르고 기른다

by 이제월

인간의 역사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역사에 의식이 있다고 바라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역사가 일종의 인격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고, 마치 자기 의지가 있는 것처럼 나아가는 방향이 있다, 역사에는 우연을 넘어서는 절대정신과 그럼으로써 역사가 나아가는 ‘방향’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방향이 있다고 하는 것, 말하자면 ‘역사법칙’을 운위하는 건 현대에 와서 대부분 부정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와 인류의 집단지성은 역사가 스스로 나아가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입증하기보다는 도리어 역사를 지배하는 것 우연 또는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라고 즉, 복잡성에 의한 카오스를 더 지지합니다.

바로 직전에 한미 양국 간 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국빈방문은 아니고 실무적 방문이었는데, 1기 때에 이어 이번 2기 임기를 보내는 트럼프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상 간 외교에서도 현란한 ‘거래의 기술’을 보이고, 종종 판을 뒤집고 널뛰며 굴욕과 곤란을 안기기도 하였습니다. 정상회담 직전 그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몇 문장은 ‘숙청’이나 ‘혁명’ 같은 거친 단어를 담고 있었고, ‘사업을 할 수 없다’는 판결 같은 말조차 들어 있었습니다. 회담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왔고, 한국 내에서는 정치적 반대파들이 국익 앞에서 하나가 되기보다는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트럼프의 무례와 돌발언행 대신 한국 대통령이 무능하다고, 내란 이후 특검의 활동을 법적 활동이 아닌 불의한 정적 제거로 몰아가는 데 지렛대 삼아 인용하고, 널리 퍼뜨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회담이 30분 연기되면서 위기론은 더 힘을 싣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회담은 환대와 농담, 덕담을 건네고 오해를 풀고 현안에 입장을 같이하는 등 딴판으로 흘러갔습니다. 트럼프가 쓴 『거래의 기술』을 읽고 공부했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이 헛되지 않은 걸까요. 양 정상은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끌고 갔고, 소셜미디어에 쓴 사안에 대해서도 기자들 앞에서 실황으로 ‘오해였다’로 정리되었습니다. 회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텅 빈 말들이 오간 것처럼 평가하는 것도 일리가 있고, 중요한 현안은 전부 뒤로 밀렸다는 평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를 예상(또는 기대?)하는 와중에 펼쳐진 외교 쇼는 몇 가지 흥미로운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두 나라는 두 나라 사이의 일 대신 다른 나라들을 이야기했고, 특히 한 나라를 이야기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의 일을 두 나라 공통의 일로 만들었습니다. 북한을 끌어들인 것이지요. 이때 쓰인 수사(修辭)가 peacemaker. 피스메이커. 평화를 만드는 사람. 트럼프가 평화를 만드는 쪽인지 파괴하는 쪽인지에 대한 판단을 잠시 미루어두고 저 수사만 따져봅시다.

피스메이커는 좋은 말일까요, 나쁜 말일까요? 과거에 어떤 나라는 — 예컨대 히타이트 — 그들의 왕이나 지도자가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면 단호하게 처형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의 승리를 통해, 전리품을 활용한 경제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기는 하지만 대강은 맞습니다). 즉, 전쟁은 번영과 동의어이고, 평화는 번영의 반대말이었던 겁니다. 인류가 적은 수가 지구상 곳곳에 흩어져서 각각의 세계를 이루고, 그 세계들이 부딪쳐 하나의 세계가 되어가면서 초기 아니, 상당히 긴 시간, 어쩌면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히타이트의 사고방식이 통용되었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화에 대한, 평화의 수위성과 수월성이 충분히 논증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정치적 선언과 선전일 수는 있어도 평화가 왜 필요한가에 대해 논증된 바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쟁과 평화의 강렬한 대비를 느끼고, 평화를 바라고, 평화와 번영을 동의어로 받아들였습니다.

인류사는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늘리는 방향으로 서서(徐徐)하지만 분명하게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의지가 아닙니다. 역사를 사는, 역사에 휩쓸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는 사람들의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가리켜 피스메이커라고 한 말에서 그가 피스메이커가 맞는가 따지는 건 좀 더 실무적인 일입니다. 그건 의지와 의지의 만남, 어긋남, 어울림의 합(合)에 따른 일이니까요. 그것은 한 사람의 신원(身元)이 아니고 하나하나의 일들이 갖는 함의(含意)일 뿐입니다.

네, 그가 피스메이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조금 미심쩍을 수도 있고, 혹시…하며 기대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느 쪽이건 우리는 피스메이커 편에 서면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페이스메이커일 거고, 그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 중 하나는 ‘식별력’일 겁니다. 시대정신을 읽고, 시대정신을 갱신하는 능력 말이죠.

피스메이커, 그런 영웅을 메시아처럼 바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일을 해낼 때 피스메이커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일단 우리는 회담에서 피스메이커와 라임을 맞추어 발화(發話)된 나머지 한 낱말, pacemaker. 페이스메이커일 수는 있습니다.

평화는 물건이 아닙니다. 어느 사람도 아닙니다. 평화는 번영이되, ‘공동의 번영’입니다. 가능한 아무도 희생당하지 않고, 함께 누리는 번영이고, 그렇다면 결실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일방의 희생이 없어야 합니다. 낱낱이 쪼개어 그것이 평화다, 아니다 말하는 대신 그것들이 모아진 콜라주가, 전체 그림이 평화가 되는지, 그 안에 저마다의 자리가 주어지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건 즉, 미완성이고 진행중인 여정 안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아직 그려지지 않은’ <나중의 그림>을 ‘미리 내다보기’를 지시합니다.

피스메이커는 누구 따로 있지 않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길과 방법에 <동행>하는 우리들, 페이스메이커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닿기 위해 버스며 전차를 환승하고, 걷거나 킥보드나 바꾸어 가며 나아가듯이 매순간의 피스메이커를 선택하고 나아가면 됩니다. 인류는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습니다.

역사(歷史)는 왕이나 신이나 영웅 들의 역사(役事)가 아니라 이런 민중, 피스메이커들이 저들을 말 삼아, 배 삼아 갈아타고 부리어 온 것입니다. 산책 중 뒤에 서든 앞에 서든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인 것처럼. 자리 때문에 혼동하면 안 됩니다.

저들은 공인이요, 기구입니다. 도구입니다. 우리가 탈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에게 조종을 맡기지 말고 계속해서 평화의 길을 만들도록, 피스메이커로 기능하도록 보고, 잡고, 움직여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권력이 자기 보존하는 속성에 저항해 그 교체가 무혈로, 폭력 없이 이루어지도록 억제하고, 민과 민 사이에는 사랑을 확장하도록 고안한 제도입니다. 평화를 바라자 평화가 방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페이스메이커입니다. 피스메이커를 고르고 기르고 부려야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예람이에게 | 시와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