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대지

신은 분노도 호의도 알지 못한다(에피쿠로스)

by 이제월


“필연성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필연성 안에 갇혀 살아야 할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 에피쿠로스 지음, 조정옥 엮음, 『쾌락의 철학』, 동천사, 1997년, 54쪽.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필연성’은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운명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반대합니다. 운명을 배격하며 그는 운명에 스스로 매이지 않는다면 거기에 꼭 매이지 않는다고 일러줍니다. 이 말은 뒤집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운명[처럼 보이는 것]대로 흘러갈 거란 말입니다.


“지극히 행복한 불멸의 존재인 신은 괴로움을 지니지 않으며 다른 이에게 괴로움을 주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분노도 호의도 알지 못한다. 분노나 호의는 약한 존재들에게나 있는 것이다.”

― 『쾌락의 철학』, 21쪽.


신은 운명 바깥에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갇힐 필연성이 없는 필연성에 갇히는 까닭을 고통에서 찾았습니다. 괴로움을 겪기 때문에 흔들리고 분노나 호의가 일어나며, 행복하지 못하고, 필멸한다는 것입니다. 분노나 호의는 그래서 약한 존재들의 표식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이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분노나 호의를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걸까요? ‘갖지 않는다’는 부정형은 오히려 스토아 학파에 어울립니다. 그들은 아파테이아(ἀπάθεια, apátheia) 즉, 파토스가 없다(a), 어떠한 정념도 없다는 뜻으로 아파테이아를 추구합니다. 그들의 쾌락주의는 쾌를 해치는 불쾌를 제거하여 도달하는 평정심입니다. 비하여 에피쿠로스는 혼란과 동요가 없는 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α, ataraxía)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는 고통을 줄이고 즐거움 특히, 정신적 평온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들은 소크라테스가 불붙인 선, 도덕, 윤리의 담론에 하나의 마디를 짓는데, 객관적 선을 주관적 행복과 합치한다고, 일치시킨 이들입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결국 도덕적 선이 그의 정신적 평온을 지켜준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이게 불멸과는 무슨 상관이고, 분노노 호의가 없는 것과는 무슨 상관일까요? 이는 아파테이아나 아타락시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개인적 정념을 일으키지 않기에, 오직 판단하고 행위하는 기준은 실제로 그것이 좋은가, 선한가 하는 잣대만 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 존재는 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과 다른 게 없으니까요.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 『쾌락의 철학』, 73쪽.


사고함에 있어 에피쿠로스를 따른다면 우리는 자기 정념을 다스리고, 정신의 평온을 얻는 데서 운명을 탓할 수 없고, 손을 놓고 있지도 못합니다. 그 올바른 판단을 얻는 것은 바로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당신은 최고의 행복을 얻고, 최고선에 다다르기 위해서 신에게 바랄 것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신과 인간의 관계가 주종관계라면, 이로써 당신은 노예가 될 일이 사라집니다. 사라졌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이건 그대가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다만, 누군가는 평생에 걸쳐 궁리하고 그렇게 결론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생각들을 습합하고, 그 안에서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조각해 내십시오. 또는 낳으십시오.


이건, 기도할 필요가 없겠죠?

만일 기도한다면 그건 노예가 주인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근사한 친구에게, 자, 내가 어쩌는지 잘 보라구, 하며 동행을 청하는 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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