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달빛독서

안개에 가려진 것들 (스포일러 포함!!)

by 이제월






영화 <미스트>(원제: The Mist)*를 보고 나누는 글



1. 영화의 표면


영화의 장치라는 측면에서 마트라는 공간과 자동차, 또 장소를 껴안는 메타-장소로서 안개는 이 영화의 거의 전부입니다.

물론 안개가 끼기 전과 안개가 걷히기 전의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폭풍과 폭풍의 흔적, 안개가 다가오는 앞장면, 여기서 이웃과 마트로 향하는 데이빗 일행은

바삐 움직이는 군인들을 만나고 변호사인 이웃은 그들에게 <화살촉 프로젝트>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며 드러나는 군대의 모습, 군대와 함께 지나가는 살아남은 이들.

그 살아남은 이들 가운데에는 멍한 표정으로 데이빗과 마주보는 어머니와 자식이 눈에 띄는데

그녀는 바로, 마트에서 초기에 모두가 밖에 나가길 거부할 때,

그리고 데이빗이 자기 자식을 핑계로 동행을 거부할 때,

혼자서라도 마트 밖으로 나간, 자식을 찾으러 나간 그녀입니다.


마트는 공포를 극대화하는 공간이자, 제한된 공간에 머물지 않고 일종의 인간군상의 대표자 집단, 표본집단으로 기능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계(界)는 다른 계(약국-길-마을)와 접촉을 거부하면서 점점 파괴적이 되어갑니다.

곧, 외파(外破)를 피하려 들면서 내파(內破)를 겪습니다.


외파를 피하려다 내파를 겪는 것은 마치 화살촉 프로젝트가 (영화 속 병사의 입에서 언급된 대로라면)

동경에서 공포로 상황을 전이시키는 것과 닮아 있습니다.

가장 용감하고 의로워보이던 데이빗은

최초의 상황에서 자신이 스스로 비겁한 줄 모르고 저지른 비겁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스스로 쏘고 맙니다.



2. 영화의 내면


1) 안개


안개는 비단 영화에서뿐 아니라 여러 문화에서 기본적으로 <무지>를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안개가 가리키는 무지는 때로는 신성한 것을 숨기고 있고, 때로 추악한 것이나 무서운 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성한 것과 두려운 것은 본래 하나랍니다.

신성하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인 동시에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는 것, 그것이 갖는 속성이죠.

곧 불가해한 것, 그러면서 거부할 수 없는 것의 속성인 겁니다.

따라서 그러한 속성을 지닌 이, 지닌 것은 감춰져야 하는데, 이때 효과적으로 가리는 것이 안개입니다.


안개 속에는 그래서 모든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는 마지막 엔딩에서 모든 것을 보여준 척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확인할 수 없습니다.

먼저

과연 화살촉 프로젝트는 무엇인지 즉, 그것이 정말로 이계와 통하려는 시도였는지를 확안하여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권위 있는 자의 말로 확증되거나 직접 당사자들로부터 발설되는 대신

이미 공포에 질린, 동료를 잃은 군인이, 이미 스스로 죽음에 달린 자들이 한 말이라며 전할 뿐이지요.

무언가 실험한 것도 맞고, 그 실험이 이 사태의 원인이 되는 것도 맞습니다(영화 속 약국에서 마주친 헌병의 말을 상기합시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다른 세계의 생물인가요?

혹 다른 세계란 우리 머릿속이고, 생물은 우리의 환영은 아닐까요?

즉, 실헌에서 유출된 것은


안개는 <무지>입니다.

안개를 곧바로 <두려움/공포>로 환원하는 것은 편하지만 온당하지는 않습니다.

공포를 주는 것은 안개 속에 <숨은 것>이며, 이 숨은 것을 품고 있기 때문에 안개가 두려운 것이니 말입니다.



2) 이계 생물들


이계의 생물들 혹은 거대 벌레 등 <괴물>들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생물들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움직이는 패턴인데, 이상하게도 밤에 사람들이 잠을 잘 때면 그들도 얌전합니다.

괴물들도 잠을 자서 그럴까요? 그건 이상합니다. 인물들은 무슨 까닭에선지 밤이 되면 그것들이 대거 습격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리고 첫째날 밤에 그것은 현실로 들이닥쳤습니다.

하지만, 탈출의 밤에서 새벽까지 괴물들은 얌전하지요. 비록 광신적 교주가 된 인물에 의해 탈출자들은 제지당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밤은 평온하여 모두 잠들 수 있었습니다.

혹시 이계 생물들은 인간들이 <불러들일> 때에만 오는 것은 아닐까요?

광신자가 교주가 되는 <입문식>은 벌레들의 움직임과 관련 있습니다.

두려움에 기도하던 그녀가 벌레가 가슴에 붙자 과감하게 두려움을 벗고 자신을 내어맡기는데 그 순간 벌레는 슬며시 떠나가지요.

이계 생물들은 사람들의 두려움 또는 안전감을 마치 전자극 신호처럼 받아들이는 것만 같습니다.


이는 데이빗 일행이 움직일 때에도 반복됩니다.

데이빗이 용감한 동안 그는 무사합니다.

데이빗이 타인을 구하려는 동안 그는 무사합니다.

그의 안전/불안전과 관련된 강한 신호가 발산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이계 생물들 또는 괴물들은 기본적을 <타자>입니다. 두려운 타자.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공포가 형상화된 것뿐입니다.

타자는 입장을 바꾸어 그의 편에서는 자신이지 타자가 아니니까요.

사실 영화 속 괴물이 아니라도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들, 그렇게 여기는 이들에 대해

경계심을 가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타자라는 것,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입니다.

(살인자나 거짓으로 속이는 자, 폭력을 가하는 자 들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괴물입니다.

그리고 본래 타자인 탓보다 더, 그들과 우리를 동일시할 수 없음으로 해서 타자입니다.)



3) 불/빛


비록 인물들이 <불도 소용없고……>라는 대사를 뇌기는 하지만

사실 불은 일정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잘 쓰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괴물을 퇴치하는 데, 괴물을 불러들이지 않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마트를 태울 뻔한 것인데

— 그리고 우리는, 인류가 불을 잘 써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

이들은 불을 잘못 쓴 자신들을 탓하는 대신 불조차 소용없었다고 말하지요.

스스로의 무능을 인정하기보다는 상황이 지닌 한계로 <핑계>대는 것입니다.

불이 <핑계> 또는 <은닉>으로 은유되는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어져요.

군인들은 안개가 걷히는 속에서 사방을 태우는데 화염방사기가 태우는 것은

괴물들의 흔적일까요, 또는 괴물들을 상상하며 광기를 부린 인간들의 흔적일까요?

어쨌든 불길은 질문을 허용치 않은 채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진짜 불과 가짜 불의 차이랄까?

불은 언제 진짜로 기능하고, 언제 가짜로 기능하는가?

혹은 불의 진짜 기능과 가짜 기능은 무엇인가?

묻게 됩니다.



4) 생존


처음에 죽어가는 인물들을 봅시다, 아니, 끝까지 죽어가는 인물들을 봅시다.

그네들은 두려움에 지쳐 쓰러져갑니다.

반면 두려움을 이기고 용기를 발휘하는 이들은 살아남습니다.

물론 만용을 부리는 것은 용기로 쳐주지 않아요.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또한 용기뿐 아닙니다.

용기는 한계가 있어요.

용기는 자신의 용기가 무익하다는 판단에 다다를 때 수명을 다한답니다.

달아나던 차의 기름이 다 떨어졌을 때 데이빗과 그 일행들의 상태가 그렇죠.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는 다른 하나, 보다 온전하고

외부 상황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은, 고리타분하게 들릴지라도, 사랑입니다.

마트에서 안개 밖으로 걸어나간 첫 번째 여인은 자녀에 대한 <사랑>과 <염려> 때문에 움직였고,

아마도 그녀는 그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괴물들 또는 괴물의 환영을 불러오는 안개에 지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그녀를 잠식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트 안에서 두려움의 전도사를 자처한 광신자 교주가 된 그녀와는 전혀 상반된 이미지입니다.

데이빗이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고 있지만, 그것은 이야기의 서술상 그럴 뿐이고,

이 영화는 어쩌면 살아남은 그녀와, 마트에서 죽임당한 그녀의 이야기입니다.

안개는 그 둘 사이에 흐르고 있고, 사람들은 그 둘 사이에서 선택합니다.


생각해 보면 데이빗이 움직일 때에도, 그밖에 다른 몇몇이 움직일 때에도 그것이 일정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또는 애시당초 실행되는 데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작용하였지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염려가 그들을 온전하게 했다면, 지나치게 설교조인가요?


그러나 제게 이 영화는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종교적 선언이 아니라

인류학적 선언으로.

인류는 언제나 어려움에 직면해 살아왔습니다.

그 앞에서 인류는 두 가지 선택 가운데 매순간 하나만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부정/회피) 또는 사랑(긍정/수용).




사랑하는 동안 살아있던 그들은

두려워하는 동안 죽었다.




괴수영화 또는 재난영화를 기대하고 갔다가

뜻밖에 무거운 메시지와 만났습니다.

그저께 보았는데,

어깨가, 머리 뒷쪽이 묵직해요, 아직도.







“그저께” 보았다니.

저는 이 영화를 그저께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저 글을 처음 쓸 때가 영화를 보고 이틀 뒤였던 것이죠.

위 글을 쓰고, 영화를 읽고 쓰는 카페에 나눈 것은

2008년 1월 26일. 0시 56분이었으니, 어쩌면 영화를 본 것은 1월 24일 아니, 23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그저께’ 보았습니다.

잊고 있다가 찾아서 보았습니다.

<미스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글 썼던 것이) 기억났거든요.

그리고는 다시 써 보려다가 말투를 고치고 통틀어 한두 문장을 보탠 것뿐

단어도, 줄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때 우려한 괴물의 시대, 괴물을 만드는 — 우리가 두려움에 먹힌 시대가 전세계에 걸쳐 펼쳐진 게 아득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예술가들의 예언이 맞다면 나머지 한 측면, 사랑하고 연민하여, 염려하여 두려움을 이기는 이들이 살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어느 게 더 낫느냐, 뭐가 옳으냐 그르냐 다투는 시절을 지나버렸습니다. 이게 막바지의 징후인지 딱히 아무것도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리는 여기 섰습니다.

같이 살든지 같이 죽든지 하는 시대에.


삶에 서겠습니까, 죽음을 쥐시겠습니까?




*<미스트>.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스티븐 킹 원작(소설), 2007년작. 한국개봉일은 2008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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