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긴 뭐가 돼? 할 뿐.
20세기 말은 바야흐로 인터넷의 시대였고
21세기에도 그 흐름이 이어졌습니다.
피씨(PC)통신의 시대가 뜨겁게 지나가고
금세 광섬유통신이 시작됐습니다.
그 시기 컴퓨터 기술도 향상돼 286, 386, 486 하던 명칭도 펜티엄을 지나 굳이 숫자를 호명할 것도 없이
가파르게 성능을 올려 시대에 발맞추거나 혹은 이끌었습니다.
용산전자상가가 흥했고
예전 청계천에서 탁하고 두드리면 신통하게 켜진다던 텔레비전의 신화가 컴퓨터로 재현됐습니다.
음란서적과 사진을 잡지에서 찾고
세운상가에서 일본에서 몰래 수입한 비디오를 찾던 사람들은 이제 인터넷 브라우저에서 욕망을 소비해 소라가이드니 하는 것들이 퍼졌다가 폐쇄되기도 하였고
불법촬영물이 유포되고 그것들을 갤러리처럼 모아 취급하는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무슨 본좌니 하며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인 양 명성을 얻기도 하고, 야설이라 부르는 바닥에서 주목받는 필명들도 있었습니다.
소리바다로 대표되는 음원 스트리밍과 저작권 문제도 있었고, 토토브라우저니 토렌트니 하는 P2P 방식으로 저작물이 무단으로 유통되는 중에 유료로 정식 구매하는 일도 병렬한 시대를 보냈습니다.
게임의 시대가 오고 친구들은 현실보다 게임 중 채팅으로 더 많이 대화했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죽치고 있거나 클럽에 다니는 문제 같은 것을 덮을 만큼 인터넷과 게임 중독은 시끄러운 사회 문제가 됐고, SNS 탓에 청소년과 청년의 우울증이 증가하고 자살에도 영향을 미쳤다고들 합니다. 마침 발달 중인 뇌과학은 전전두엽에 미치는 영향, 작업회로의 형성에 방해를 미치는 점 등 다양한 관점도 제시했고, 중독이 무엇인지 중독 현상에 대한 과학과 철학, 사회정치적인 담론들도 전개됐습니다.
그러다가 혐오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일간베스트, 속칭 일베로 시작한 혐오의 커뮤니티는 디씨인사이드나 여러 닫힌 사이버 공간을 거쳐서 극단적 소수 의견이 과잉대표되고 지지받게 하고 갑작스레 같은 문제를 겪는 동세대 간의 분열을, 똑같이 약자로서 다른 약자와 연대하려는 시도들을 부정하며 대립각을 세우는 데 이르렀습니다. 김치녀니 김여사니 하던 조롱은 금세 미러링돼 한남 담론을 만들었고, 이런 조롱은 도가 지나쳐 곁에서 보기에도 불편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웃을 수 없는 것들에 웃으며……시대는 분노와 억울, 조롱과 멸시로 넘실거렸습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처음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는 동시에 모두가 실존에서 ‘모멸감‘을 겪고, 거기 잠겨 숨이 막히는 희한한 지경에 다다랐거니와 이는 중세에도, 고대에도 특히, 지난 세기의 초기, [두 세계대전 사이의] 간전기와 종전 후 냉전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많은 목소리가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실존을 잃을 거라는 경고.
인터넷은 우리에게 하나의 외계를 내밀었고, 우리는 그 접힌 우주를 펼쳐 거대하게 만들었으며, 그것이 어느 만큼 현실을 장악하게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두 세계의 시민권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지,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좌우할지 고민하고 헷갈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경제적 불평등뿐 아니라 자존감의 불평등도 존엄의 불평등도 확산하였습니다.
주욱 나열하면 그 어느 천년보다도 정신없는 백년이었고, 그 어느 백년보다도 할 얘기가 많고, 숙제와, 쓰레기가 많은 삼십년을 보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의 합의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극단은 극단으로 갈라설 뿐 마주보지 않습니다. 서로의 말을 듣는 능력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혼돈 속에서 이성을 잃은 걸까요, 의지를 소진한 걸까요?
우리 시대는 변화의 기준점과 변화할 지향점을 잃은 것 같습니다.
두 점을 찾지 못하면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살지 못한단 말입니다.
두 점을 찾는 것은 수고로움뿐 아니라 집단의 지혜룰 요구하고 그 요구는 사랑을 수반합니다. 그 사랑은 침묵이 아니라 마침내 말하여져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실존의 시대를 건너 이야기의 시대로 왔습니다. 어떤 서사와 어떤 서정이느냐가 중요하고, 거기에 반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실존은 위태롭게 약해졌지만, 서로 스며들고 바꾸어 변하고 공동의 실존을 만드는 것까지도 가능해졌습니다. 힘울 잃은 종교와 냉담과 무지, 불안 사이에서도 열광하고 안심하고 기대에 차 극장에서 거리에서 자생적으로 의례를 일으킵니다. 자기 삶의 특별한 경험과. 의례를 유선으로 공중에 퍼뜨립니다. 인증하는 별다른 권위도 없고 그냥 알아보고 그냥 받아들입니다. 위험성이 크고 희망도 큽니다. 우리는 개인이라는 실존을 지나 —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어 “모든 개인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실존이라는 골짜기를 지나서 — 마주칠 다음 단계를 엿보고 있습니다. 아직 어렴풋하지만 분명하게 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심장이 뛰어서 압니다. 다른 어느 감각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되어 감으로써, 결코 전과 같을 수 없어서 알아지고 알아채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시대는 태어나고 죽습니다. 시대정신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개개인의 명운을 가르는 시대의 명운은 빛과 그늘을 어지럽게 교차하며 지나갑니다. 거기서 법칙을 찾는 것은 헛되고 헛됩니다. 그런 짓을 하다간 허덕여 쓰러질 겁니다.
이럴 때엔 도리어 예측하는 대신 창조해야 합니다. 만들어야 합니다. 조용히 혹은 소리쳐 모으고 드러내야 합니다. 이차 대전 중 레지스탕스처럼, 일제 치하 독립군처럼 비밀리에 하는 게 아니라 작전부터 떠들썩하게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장으로 연결되었거든요. 같이 뛰고, 그래서 같이 걸으면 우리는 이 풍파를 지날 수 있습니다. 아주 잘 건널 수 있고, 그렇게 삶의 양식을,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을 넘어서는 라이프 프로그램(Life Program)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도 안 될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할 겁니다.
역사법칙?
마침 개밥그릇이 비었으니 거기 부어 주세요.
우리는 그런 데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데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걸로 이웃사람을 홀리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바라는 것을,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소리치고, 같이 소리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각양각색의 삶의 잔치가, 춤들이 어울려 만드는 무늬를 상상할 뿐입니다.
행동하는 상상을 할 뿐입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