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를 지[우]기
무게를 진다는 건
맞아요, 책임진다는 거예요.
무게를 지운다는 건
그건, 가치를 부여한다, 또는 발견한다는 거예요.
모든 것에 알맞게
무게를 지우세요.
잘 몰라도 얼마큼 무게를 지우고
아, 지나쳤구나 싶으면 싶은 만큼 덜고
또는 더하세요.
그렇게 올렸다 내렸다 하다 보면 얼추 무게가 맞겠죠.
틀려도 괜찮아요.
그럼 또 덜거나 더하세요.
양팔 저울을 쓰세요.
그런 대로 확신하는 것을 한쪽에 얹어도 되지만
저울의 사발에 얹는 게 꼭 정확한 것이 아니어도 돼요.
그냥 ‘이게 오늘 내 점심식사라면?’ 하는 식으로
‘이건 내가 버스 환승을 한 번 하고, 오십 분 걸려 간 가게에서
용돈 중 십분의 일을 써서 산 물건이야. 그 가게에 가면 언제나 있어.’ 또는
‘용돈 중 십분의 일을 들여 주문해 일주일 기다려 배달받은 건데, 한정판이야.
중고가 나올진 모르지만 장담할 순 없어’ 하는 식으로
그 ‘이거’를 턱 얹고서
저울의 반대편에 얹는 무언가가 지니는 정확한 가치는 몰라도
미리 얹은 것과의 ‘비례’는 가늠할 수 있으면 되어요.
그렇게 무게를 지우면
마치 물건을 정당한 값을 치르고 사듯이
정당한 ‘수고와 정성’을 들이세요.
그것을 얻기 위해서나 지키기 위해서.
이 말은 그만큼의 정성과 수고 없이는 남에게 내어주지 말라는 뜻이기도 해요.
뭐, 사랑에 빠졌다면, 측은지심이 일어났다면
그때에는 ‘거저’ 줄 수도 있지만, 그건 가치가 헐해서가 아니라
‘선사’요 ‘축복’이란 점을 상대에게 알릴 필요가 있어요.
꼭 말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정확한 표현이 곤란할 때도 있지만
상대가 느낄 방법을 고민하거나
가장 단순한 말로 고지(告知)하는 것까진, 내가 ‘할 일’이예요.
이런 건 우주가 내게 맡긴 일이란 듯, 공무원이나 경찰이 체포 중 미란다 원칙을 알리는 것처럼 거르거나 피해선 안 됩니다. 그건 상대에 대한 호의요 배려이기도 합니다. 그도 알 건 알아야죠.
각각의 것에 무게를 지운다는 건
내가 새롭게 만드는 ‘것’과 ‘일’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어렵겠지만
거기에 알맞은 무게를 지우고
그래서 그만큼의 힘 — 수고와 정성 — 을 들이지 않고는
이리로도 저리로도 옮길 수 없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그대는
‘무게를 지우는’ 것처럼 ‘무게를 지는’ 것도 배울 것입니다.
무게를 지는 건 무게를 지우는 것보다
차라리 알기 쉽습니다.
이제 나는 질량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된 질량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니까요.
책임을 지는 건 구체성의 영역입니다.
가장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조차 무게를 진다는 건
내 어깨에, 내 등에 무게를 진다는 건
그 무게를 느끼는 것
내 온몸과 온마음으로 그걸 감당하는 것이기에
하나의 육화(肉化, ensarkos)입니다.
떠 있던 안개가 내가 든 통에 맺히고 고여 구체적인 무게를
오직 그걸 든 내게 지우는, 그렇게 무게가 전가(轉嫁)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대는 ‘무게를 지는’ 것을 상상으로 해낼 수 없습니다.
무게를 지우는 것은 내가 올라가는 일이라면
무게를 지는 것은 내가 내려오는 일, 내려오는 힘 속에 있는 일입니다.
무게를 지울 때에는 내가 무언가를 거기다 쏟아 부었는데
무게를 지며
내가 힘쏟는 전부는 어딘가로 날아오릅니다.
자꾸만 사라지고 아무리 쏟아부어도 시간과 함께 흘러 사라집니다.
순간마다 들여야 하는 힘, 수고와 정성, 그리고 근육에 쌓이는 피로와
어쩌면 통증까지도가
이것이 어디까지나 실재의 일이요, 딱 그만큼의 무게라는 걸 절감케 합니다.
그러나 무게를 지우며
무게를 지며
그대는 이제 세계를 진짜로 만나는 겁니다.
살과 살을 맞대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떨어져 있을 때에도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
지금 어떤지, 곧 어떨지
세상을, 마치 나를 알듯 알 것이고
나를, 마치 세상을 느끼듯 알아챌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대는
어른이 되어 가고
우울과 몽상을 단단한 몸과 마음으로 바꾸어 가고
어느덧 제 그늘로
미래의 친구들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높이 선 나무는
멀리서도 보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나무의 그늘에
사시사철 언제나 이끌리는 법이니까요.
무게를 지우세요.
모든것이 현실이게.
무게를 지세요.
모든이에게 현실이게.
나무에게
바람이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