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

괜찮[아하]지 않기 (1) 불만을 갖기

by 이제월


올바르게 혹은 유용하게 사고하고 싶다면, 사고라는 걸 장난감이나 장신구로 남겨두지 않고 ‘힘’이 되게 하고 싶다면, 나와 내가 지키기 원하는 것을 지키는 ‘무기’로 삼고 싶다면, 그렇다면 그대가 할 첫 번째 일은 <괜찮아하지 않는> 겁니다. 나중에는 괜찮아할 것입니다. 지금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질 겁니다. 일을 모두 마친 뒤에는.


할 일 즉, 생각하기를 하고 나서는 괜찮으십시오. 괜찮은 게 좋지요. 그러나 먼저 사고해야 합니다.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고 여기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괜찮으면 괜찮은 거지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 타협은 타협조차 아닙니다. 아예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거니까요. 그냥 좋았다고요? 아무것도 안 한 겁니다. 적어도 자신을 정신적 존재로서 발동하지 않은 겁니다.

물론 저는 괜찮습니다. 낱낱의 일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생 전반에 대해서, 우주 전체에 대해서는 저는 일찌감치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결정 때문에 어떤 것은 괜찮고, 어떤 것은 괜찮지 않다는 데 대해 단호합니다. 어쩌면 제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비난해도 좋고 한심하게 여겨도 좋습니다. 감당할 것입니다. 그건 ‘내 생각’이니까요.

그러나 만일 생각하지 않고 내린 생각이라면 — 이거 참 야릇한 표현이로군요. 생각한 적은 없는데 생각은 생각이라니……어디서 꿔 온 생각이거나 바라지도 않고 찾지도 않았는데 내게 들씌워진 생각이겠죠 — 그 생각 때문에 닥치는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더 크게, 생각 없는 생각들로 채워진 인생을 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괜찮아하지 않는 것은 더 고답적(高踏的)인 표현으로 바꾸자면 ‘비판적’ 사고를 견지하는 겁니다. 비판적 사고가 고답적이진 않습니다. 비판적 사고는 늘 새롭지요. 그러나 이 ‘표현’이 진부하고, 실제로 그게 무얼 뜻하는가 ‘생각하지 않고’ 물건처럼 ‘유통’하고 있다는 뜻에서 고답적이라고 말해 본 겁니다.


어떤 것을 괜찮다고 느끼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떠올리고 형태를 보존하려 하지, 깨트리고, 다른 것과 붙여서 잇고 하는 행동들은 하지 않습니다. 아, ‘행동’이야 물론 ‘생각’을 말하는 거죠. 생각하지 않은 채 그 생각을 지니고 있게 됩니다. 뻣뻣하게 굳은 미이라 또는 콩콩 뛰는 나무막대기 같은 강시(僵屍·殭屍).


괜찮지 않다고 느끼면?

생각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괜찮지 않기 때문에 벗어나기 위해서든 바꾸기 위해서든, 아니면 내가 그것을 이해하고 감내하기 위해서라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빌 하이벨스(Bill Hybels)는 2007년 자신의 저서 『Holy Discontent: Fueling the Fire That Ignites Personal Vision』의 제목으로 거룩한 불만(Holy Disconten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거룩한 불만’은 거룩한 ‘부동의’(discontent)입니다. 이 부동의가 거룩한 것은 아무 생각도 성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진지하게, 하지만 도저히 동의할 수 없어서 부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일단 들어보지도 않고 진짜로 알지도 않은 채 동의할 수 없어서 부동의하는 겁니다. 이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선 그냥 하는 동의야말로 무례하고 무도하고 무참한 것입니다.


일단, 불만을 가지십시오. 불편을 느끼고, 부동의하십시오.

‘괜찮지’ 않다면, 그대는 성격이 좋고 천성이 선하여 물론 괜찮아할 테지만 이토록 강조하였으니 속는 셈 치고, 중요한가 보다 하면서 능동적으로 ‘괜찮아하지’ 않는다면

부릉부릉 시동이 걸리고 윙윙 생각이 돌아갈 것입니다.

휩쓸려 정신 잃지 말고 운전대를 꽉 쥐고 자신의 생각을 운행하십시오.


다음주에 이어서 이야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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