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달빛독서

가장 훌륭한 문학작품 중 하나인 『유리알 유희』에 붙이는 단상

by 이제월



이 짧은 글의 본래 제목은 「가장 훌륭한 문학작품 중 하나인 『유리알 유희』 <서문>에 쓰인 가상의 라틴어 인용문에 붙이는 단상」이지만 게시하며 글자수 제한에 따라 위와 같이 줄여 썼습니다.

민음사 판 『유리알 유희』(Das Glasperienspiel)의 번역자 이영임 번역가는 아마도 원서에서 나란히 적힌 독일어를 유려하게 번역한 것이었으나, 헤세가 굳이 라틴어 문장을 함께 실어, 작품 안에서 라틴어가 원어인 것처럼 묘사한 것을 존중할 때, 라틴어 문장을 좀 더 고려해서 번역하면 좋았으리란 아쉬움이 남습니다. 헤세가 쓴 라틴어 문장은 이렇습니다.



…Non entia enim licet quodammodo levibusque hominibus facilius atque incuriosius verbis reddere quam entia, verumtamen pio diligentique rerum scriptori plane aliter res se habet: nihil tantum repugnat ne verbis illustretur, at nihil adeo necesse est ante hominum oculos proponere ut certas quasdam res, quas esse neque demonstrari neque probari potest, quae contra eo ipso, quod pii diligentesque viri illas quasi ut entia tractant, enti nascendique facultati paululum appropinquant.


ALBERTUS SECUNDUS

tract. de cristall. spirit.

ed. Clangor et Collof. lib. I. cap. 28.


책의 좌수면에 라틴어가 우수면에 독일어가(한국어판에서는 한국어가) 쓰여 있거니와, 상대적으로 하단에 출전을 밝히듯 표시한 부분은 독일어 번역을 그대로 소개해도 좋을 것입니다.

알베르투스 2세

정신 형성에 관한 논고 제1권 제28장

클란고르와 콜로프 출판




그러나 작가가 창조한 인물 ‘알베르투스 2세’의 글로 설정된 ‘인용 본문’은 한국어판에 옮긴 자연스러운 문장, 아마도 출발어가 독일어일 우수면의 내용은 무시하고, — 나의 의도가 번역의 잘잘못을 따지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더구나 그 번역은 그대로 훌륭하기 때문에 해당 한국어 번역을 여기 옮기지 않으며 — 좌수면의, 헤세가 ‘인용문’의 형식을 빌어 작품 전반을 도입하고, 어쩌면 — 나는 바로 그렇게 확신하는데 — 해석 원리를, 독자의 읽는 태도를 안내해 주는 부분을 라틴어로서 읽어내기를 희망합니다. 현대의 독자이며, 한국인인 그대에게 라틴어 실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몇 년 널리 쓰이게 된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런 경우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그 도움을 받으면 충분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경박하고 가벼운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보다도 오히려 더 쉽게, 또 무심하게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사물의 저자에게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말로 밝혀지기를 그토록 거부하는 것은 없으나, 동시에 인간 앞에 내놓아야 할 필요성이 그토록 절박한 것도 없다. 그것은 곧,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도 없고 논증할 수도 없는 일정한 어떤 것들이다. 그러나 바로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사람들이 그것들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다룸으로써, 그 어떤 것들은 존재와 생성의 능력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첫 문장은 특별히 ‘사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를 갖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사물’처럼 ‘허구’를 뜻하지 않고, 존재의 양태 중 ‘무’와 ‘비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즉, ‘가능태’를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능태(可能態, potentiality)와 현실태(現實態, actuality)는 서양 철학에서 기본으로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두 단어의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보면 우리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할지 더 잘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가능태는 그리스 말로 뒤나미스, δύναμις (dynamis)이고, 현실태는 그리스 말로 에네르게이아, ἐνέργεια (energeia), 엔텔레케이아, ἐντελέχεια (entelecheia)입니다. 라틴어로는 가능태가 포텐씨아(potentia), 현실태가 악투스 또는 악투알리타스(actus, actualitas)입니다. 영어의 다이내믹(dynamic)과 에너지(energy), 액트(act) 같은 말들이 여기서 나온 건 물론입니다.

헤세가 여기서 쓰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표현은 정말로 존재를 갖지 않는 것, 비존재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무’는 존재의 다섯 양태 중 하나이지 존재-아님은 아닙니다. 헤세는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저자들뿐 아니라 “경박하고 가벼운 사람들”도 이것을 “말로 표현”한다고 함으로써 그것이 ‘말하여질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하고 있습니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는 필연적이고 완전한 것 즉, 신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는 허구/가상이든지, 현실하는 사물이거나, 언어와 사유의 결과물인 개념이거나 현실태와 가능태가 뒤섞인 것이든지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여지는 것은 어쩌면 ‘다가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가와서, 처음에는 미미하다가 점점 거대해지고, 심지어 필연으로 밝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말하여지는 것은 말하는 자의 위치에 따라서 이미 완전히 실현된 채로도 마치 덜 실현된 것처럼, 혹은 전혀 실현되지 않은 것처럼 허깨비마냥 말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가 경건하고도 진중하게, 높은 양심으로 정성껏 말하려 하는 것은, 그러하여야 한다는 필요를 강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어느 것을 최대한 말할 때, 그것이 가진 온전한 품위와 권능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며, 결코 넘치게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나 모자라게 드러날 수는 있으므로, 말하여지는 대상[이 얻을 유익] 때문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우리, 이 말함-말하여짐의 사슬에 의해 그 말을 누릴 수 있는 ‘듣는’ 우리에게 진정한 유익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자를 친절과 성의로 대하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상대를 위하는 마음에서 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상대를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언제든 소홀해질 수도, 비굴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최대의 선익을 위하여 상대의 현실태를 넘어서 가능성을, 나아가 필연을 소환하고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하며, 특히 언어가 마법이라는 걸 깨달은 자라면 — 그리고 온전한 정신을 지닌 이는 마땅히 이것을 알고, 알게 될 것이려니와 — 더욱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성은 웬만큼 해서는 아니 되고 지극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말하여야 합니다. 어김없고 틀림없게 말하고자 애타고 힘들어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해서만 우리는 존재의 나머지 양태를 깨울 수 있습니다. 현실에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마치 유리알 유희 장인이 그렇게 하듯이.





꽤 길지만 『유리알 유희』의 「서문」 말미의 요제프 크네히트의 말은 통째로 읽고 곱씹을 만한 아름다움과 영감이 들어 있습니다: 아래 민음사판의 번역을 옮겨 싣습니다.


그러나 모든 개별 유희자에게, 아니 명인에게 있어서조차 유리알 유희는 우선적으로 하나의 연주이다. 요제프 크네히트가 언젠가 고전 음악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말이다.


“우리는 고전 음악을 우리 문화의 정수요 총화라고 여긴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가장 뚜렷하고 독특한 몸짓이자 표명이기 때문이다. 이 음악 속에 우리는 고대와 기독교의 유산을, 명랑하고 용감한 경건함의 정신을, 탁월한 기사도의 도덕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고전적인 문화의 태도는 궁극적으로는 도덕을, 태도로 응축된 인간적 행동의 모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정말 다양한 음악들이 만들어졌는데, 양식과 표현 수단은 가지각색이지만 그 정신, 아니 도덕은 모두 동일하다. 고전 음악으로 표현된 인간적 태도는 늘 똑같다. 그것은 언제나 같은 종류의 생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같은 방식으로 우연을 넘어서려고 노력한다. 고전 음악의 태도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인간 존재의 비극을 아는 것, 인간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 용감함, 청랑함! 그것이 헨델이나 쿠프랭20)의 미뉴에트에 드러나는 우아함이든, 이탈리아 작곡가들이나 모차르트에게서 볼 수 있는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승화된 육감성이든, 혹은 바흐에게서 나타나는 조용하고 침착한 죽음에의 각오이든 상관없이 거기엔 언제나 불굴의 의지, 죽음을 무릅쓴 용기, 기사도 정신, 초인적인 웃음소리와 불멸의 청랑함이 울리고 있다. 우리의 유리알 유희에도, 우리의 전체 삶과 행위와 고뇌에도 그런 울림이 깃들어야 한다.”


이 말은 크네히트의 제자 한 사람이 받아써 두었던 것이다. 이 말로써 유리알 유희에 대한 우리의 고찰을 마친다.




우리의 읽기는 우리의 가장 본질적 쓰기인 ‘삶을 살아가기’에 고뇌하고 한계[를 상상하는 우리 인식의 습성과 되풀이]를 ‘넘어서기’를 요청하며, 요청에 대한 응답 자체가 되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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