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물길

사랑할 것인가. 한글날에 부치는 생각조각

by 이제월



훈민정음(訓民正音)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니

뭔가 좀 기분 나빠할 분들도 계시리라.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선생(先生)은 먼저 난 죄로

그 앞에 세상이 먼저 펼쳐진 죄로

몰랐으면 몰라도

알면 가르쳐야 합니다.

알면 배워주어야 합니다.

배워준다는 말은

알 때까지 계속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방법을 알면 지혜롭게

방법을 모르면 무식하게라도.


신비와 지식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져도

모두가 똑같은 소화력은 갖지는 않기에

그것으로 차별하지 않고

끝내 상대를 믿어

알려주려하는 마음은 갸륵한 마음입니다.

이를 공간에 묶인 신체와

시간에 묶인 수명을 넘어서서 이으려는 마음은

거룩한 마음입니다.


어쩌다 우리는 가장 물질적으로

모든 걸 일종의 흙덩이로 풀어 보는 습관을 가졌습니다만

이 현대의 병증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대로 그런 해석만으로는 불만족하기에

불만족하는 우리의 좋은 욕심이

대체 저게 뭘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면 헤매다가 식견이 생기고

헤매다가 때론 길을 찾아

경계를 벗어납니다.

경계 밖에서 돌아보고, 점점 더 멀리 떨어져 조망하게도 됩니다.


그렇게 한눈에 보면

한때 나였던 저것이 무엇인지 알아집니다.


훈민은 애민(愛民)이었고

애민은 완구처럼 예쁘다 귀엽다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아지고, 나를 넘어서고

내 곁을 지나쳐서 나 모르는 데까지도 마구 가는 것을

눈물 흘리며 웃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추락하는 꿈과

상승하는 꿈은 동일합니다.

정신에는 달리 중력이 없으니까요.

사고하는 습관에는 중력이 있지만

정신 자체는 혹은 영혼은 중력을 갖지 않고

중력에 영향 받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내 몸을 벗지는 못해도

마음이 다른 이를 품고

다른 이를 앞세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애민은 깊은 물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보상(報償)이나 보상(補償)은 없고

한편이 될 뿐입니다. 한편이 되고 한몸뚱이가 되는데

먼저 보고 먼저 말하고 먼저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니 애민이 훈민이 되고,

사랑이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 됩니다.

그 해방은 나와 내 전부를

— 이를테면 세종이 조선이라는 왕국을 굳건히 하려 정음을 창제하였다는데

정음은 끝내 대한이라는 민국을 세우고 펴는 토대가 되고 날개가 되었듯 —

부수는 것을 포함합니다.

내 해방이 아니라 너의 해방을

나의 해방으로 여길 때,

나는 ‘우리’의 대표입니다. 내가 우리의 대표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고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표를 일컬어 왕이라고 합니다.

왕이 되고자 한 왕이 많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그걸 한 왕이 있기는 있는 것입니다.


시민은, 왕이 없는 시대의 왕입니다.

그러나 왕이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왕이 하는 노릇도 판이합니다.

왕은, 다른 이를 왕 만드는 왕만이 진짜입니다.

시민의 시민성은

제 탐욕에 저를 처먹는 아귀(餓鬼) 꼴이 아니라

남에게 먹히는데

그게 먹히는 게 아니고 저를 살려 먹이는 줄 아는 데서 태어나고 지속합니다.


시민은 마치 왕처럼 자기 공동체를 돌보고

주권의 경계를 넘어

겉으로 어디에 울타리를 세우든 개의치 않고

시민을 늘림으로써 시민성이라는 왕권을 강화합니다.


한글은 쉬운 글자입니다.

우리말이 쉬운 말이 아닌데도

쉬운 글 덕분에 처음 쏜 화살이 멀리도 날아갑니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진 자리에서 주워

다시 멀리 날릴 때에는

문득 깨닫습니다.

야, 이거, 첫번에는 공으로 난 거구나.

내가 안 쏴 봐서 몰랐네.

이거 쏘려면 힘 깨나 쓰는구나. 아이구, 죽겄다, …해가면서

힘껏 당기고 잘 겨누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워낙 활과 화살이 좋으니

과녁을 관중(貫中)하기 넉넉할 것입니다.

말글살이의 본령을 충족해서

그대의 답답함을 풀 것입니다.

이 마음은 저 마음에 닿고

저 마음은 이 마음에 이어져

여간 곱지 않을 겁니다.

말글이 강강술래 큰 동그라미는 그려야지

찌끄러트리거나 끊는 것이어서야 영 모양 빠지지 않습니까?


말글은 사랑으로 하는 짓입니다.

사랑도 없이 한다면 참 헛짓거리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말이 더 힘을 얻고

글이 사랑을 죽이지 않게

되게 멋진 글이 지어졌습니다.

그걸 기념하는 날이라니, 이주에 맞는 한글날*

생각할 때마다 흥겹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애환도 같이 춤추어지는

신명나는 일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위대하고

적어도 갸륵하고, 크게는 거룩한 일인데

제대로 해내려면

어지간한 수고로는 부족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좀 꿈틀대지 않나요?





*한글의 창제와 반포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기록이 부족합니다.

실록에는 1443년(세종 25년) 12월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하고,

1446년 9월조에 “是月訓民正音成”(시월훈민정음성)이라고 적혔으니, 그저 “이달”이라고까지만 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正統十一年 九月 上澣」

(정통 11년 9월 상한)


즉, “명나라 정통(正統) 11년 9월 상한(上澣)” 에 훈민정음이 완성 혹은 반포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정통 11년”은 조선 세종 28년(1446년)에 해당합니다.


‘상한(上澣)’ 은 음력 한 달을 초순·중순·하순으로 나눌 때,

상한(上澣) = 초순 (1일부터 10일 무렵)

중한(中澣) = 중순 (11일부터 20일 무렵)

하한(下澣) = 하순 (21일부터 말일 무렵)

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9월 상한” 은 음력 9월 1일~10일 사이, 즉 1446년 음력 9월 초순을 뜻합니다.

세종 28년(명 정통 11년) 음력 9월 상한(上澣)은

양력 1446년 10월 1일에서 10월 9일경에 해당합니다.


10월 9일을 택하여 ‘한글날’로 기념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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