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일까? — 영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읽고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Peter Webber 감독, 2003년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에서
그리트는 베르메르**를 사랑한 걸까?
거꾸로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사랑했을까?
이 질문으로부터 글을 쓰게 됐습니다.
만일 탐미(耽美)를 사랑의 한 가지로 볼 수 있다면
베르메르는 어쨌든 그리트를 사랑했으며, 그리트는
베르메를 ‘통해’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은 두 사람 다 서로를 ‘통해’ 다른 무엇을 추구했습니다만.
푸줏간 아들의 권유를 거슬러
결국 쫓겨날 때까지 화가의 집에 머무르는 하녀는
그 화가 때문이라기보다 이제 눈뜬 그림의 세계,
아름다움(美, beauty)과의 긴밀한 접촉을 더 아쉬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베르메르 역시 그리트를 원했다기보다
그리트의 미 내지는 그리트를 통과해 전달되는 미에 사로잡힌 것일 겁니다.
만일 화가가 그 하녀를 사랑했다면
그것은 일순에는 아니라도 점진적으로
‘하녀’라는 처지, 넓게는 가난 속에로 들어갈 수 있거나 [수용 또는 수렴],
거기에 적극적으로 저항 내지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요? [발산과 초극의 기도(企圖)].
둘 모두 동상이몽했지만
그리트의 경우가 좀 더 순수했다고 봅니다.
그리트는 미의 세계와 화가를 혼동할, 적어도 근친자(近親者)로 볼
충분한 개연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것이 현실에서 둘(미의 세계와 그리트)을 연결시킬 아마도 유일한 매개란 점에서 말입니다.
반면 화가가 사랑과 욕망을 뒤섞어 볼, 그러니까 혼동할 개연성은
보다 적어 보입니다.
그는 좀 더 가진 게 많았기 때문에 — 결국은 저도 빌어먹는 처지이건만 —
모험은 하기 힘든 것이었겠지요.
마지막에 타네케(베르메르 집 하녀)가
“이건 네 소유”라며 집을 나간 — 그래서 이제 ‘하녀’는 아니지만 여전히 하녀일 수밖에 없는 —
‘소녀’(그리트)에게
진주 귀고리를 건넬 때
그 ‘소유’가 뜻하는 건 무얼까요?
여러 가지 독해가 가능하지만
일단 저는 진주의 미(가치) 역시 그리트의 그것과 더불어
그리트의 세계 안에 있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연출자의 의도를 알지 못하지만
내가 찾은 느낌은 그렇다, 그 느낌이 이런 생각을 들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 영화를 일종의 멜로 영화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지만 절제된, 그러나 탐욕스러우리만치 집요한 카메라의 시선과
그 시선이 잡아내는 인물의 명암은
그들이 땅의 존재인 동시에 날기를 꿈꾸는 하늘에 속한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혹은 영주권을 얻지 못하고 거기 머물기를 꿈꾸는 불법이민자들일까요?
그렇더라도 그들은 ‘거기 살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이미 이 지상의 것은 아니란 이야기예요.
화가는 그나마 약간의 힘이 있어
그 영원한 갈망을 곧 다시 목마를 물로 채우며 살고 있는 것이었고
하녀는 그만한 힘이 없자 도리어
영원한 갈망을 품은 채 곧 목말라올 물따위 마시길 피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둘 다 우물가에서 서성대는 사람들 같습니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그림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험’입니다.
영화의 줄거리에 매몰되면 혹시 조는 사람도 있으려나요.
그렇지만 그 줄거리를 타고, 줄거리 사이를 함께 달리다 보면
쉽게 가시지 않는 특별한 감흥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것은 지상 사물들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읽기론 말이죠.
*개봉 당시 한국어 제목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나왔습니다.
표준어는 ‘귀걸이’가 틀리고 ‘귀고리’가 맞습니다.
귀걸이는 옷걸이에 옷을 걸듯, 거기다 귀를 걸어 두는 물건인데, 영화를 보건 원작소설을 보건 그게 아니거든요. 귀에 다는 장신구인 고리는 귀고리입니다. 속담에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고리’라고도 있죠.
영화 제목이므로 고유명사로 취급할까 했으나
개봉 당시 안내 전단의 일부에는 귀걸이와 더불어 귀고리를 병용하기에 그냥 ‘귀고리’로 표기했습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또는 얀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또는 Jan Vermeer, 1632년 10월 31일 ~ 1675년 12월 30일)는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출신 화가입니다. 네덜란드식 발음을 따라 표기하면 ‘페르메이르’가 맞지만, 오랜 동안 ‘베르메르’로 소개되어 우선은 당시 영화 안내 전단의 표기를 따라 ‘베르메르’로 쓰고 표준 표기를 함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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