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

고전. 방법론적 회의(懷疑)

by 이제월


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 또는 방법적 의심은

이를 고안하고 정초(定礎)한 철학자의 이름을 따 데카르트식 회의(Cartesian skepticism)라고도 부르는

사고법의 고전(古典, classic) 중 하나입니다.

의심병에 걸리잔 게 아니라

한 번 의심해 보라, 의심해서 따져보아도 맞으면 그때 가서 믿어도 늦지 않고

그사이 틀린 걸 걸러내면 좋은 일이라는 접근입니다.

안전제일? —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사고법의 한 가지로, 그것도 중요한 한 가지로

방법적 의심, 방법론적 회의를 연마하고 실행하는 까닭은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평가하는 겁니다.

우리의 정신은 신체에서 ‘뇌’를 써서 자신을 전개하는데

뇌는 포도당이라는 소화 최종 단계의 열매만을 쪽쪽 빨아 먹고

이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합니다.

그 결과가 값질 수야 있겠지만 자칫 잘못 쓰면 생명 유지와 생존 환경에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매우 합리적으로 우리의 뇌는

애초 설계되기를, 온몸에서 가장 게으르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건 일종의 관성이고 중력입니다.

심폐가 부지런하게 지어진 것처럼, 피부가 엄살 피우게 예민하게 지어진 것처럼

우리의 뇌는 할 수 있는 한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합니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선입견과 편견을 형성하고 활용합니다.

뇌를 써서 합리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뇌는 상당히 불합리하게 움직이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그 낱낱의 사건에는 불합리할지 몰라도 전체적으로는 그 편이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부합(합)하는 이치(리)란 건 그대나 내가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정의니 진리니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유지하는 데 기대값이 높은 쪽으로 설정된 모습, 뇌가 설정된 기초 형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 결과 우리는 실제의 이해(利害)나 시비(是非)에 어긋나게

내 신념이나 이익, 내 바람과 어긋나게조차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게 맞는지, 내 경험과 지식을 확장해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지

굳이 묻고 굳이 설득해 보는 겁니다. 굳이 검증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고의 길이 닦입니다.

점점 제대로 정비된 사고의 길을 갖게 됩니다.

잘 준비된 사고의 길로 생각이 지나면서

지식과 지혜의 요소들이 좋은 길목에 좋은 건물이 들어서고

많은 이들이 오가며 활용하듯

올바른 사고의 길 주변으로 올바른 생각, 관념, 신념이 들어서고 정비됩니다.


그래서 생략된 중간과정을 모두 복구하여

다시 말을 바꾸어 보자면

방법적으로 회의하라, 의심하라는 말은

행복하라는 말,

기쁨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거짓없이.


웹툰에 <역대급 영지 설계사>라는 걸 보았습니다.

동명의 웹소설이 원작입니다.

주인공은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는 부유한 “꿀 빠는 노후”를 위해 참 열심히 일합니다.


점점 위태해지게

사고의 습(濕)대로 게으르지 말고

장차 안심하고 게으를 수 있도록

지금은 좀 부지런을 떨어보자, — 이게 방법적으로 회의한다, 의심해본다는 말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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