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낸 언어를 수단으로 써요(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제6장을 끌어와서)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 Aristotélēs)의 『시학』**(Περὶ ποιητικῆς, Perì poiētikês)(시적 예술에 대하여) 일부를 소개합니다. 아래 인용부는 제6장의 첫부분입니다.
(49b24)
Ἔστιν οὖν τραγῳδία μίμησις πράξεως σπουδαίας καὶ τελείας μέγεθος ἐχούσης,
ἡδυσμένῳ λόγῳ, χωρὶς ἑκάστῳ τῶν εἰδῶν ἐν τοῖς μορίοις,
δρώντων καὶ οὐ δι’ ἀπαγγελίας,
δι’ ἐλέου καὶ φόβου περαίνουσα τὴν τῶν τοιούτων παθημάτων κάθαρσιν.
[그러므로] 비극은 그 끝까지 완결되어 있고 일정한 크기를 갖는 고귀한 행동의 재현으로서, 작품을 구성하는 구분에 따라 각기 다양한 종류의 양념으로 맛을 낸 언어를 수단으로 삼는다. 그리고 비극의 재현은 이야기가 아닌 극의 등장인물에 의해 이루어지며 연민과 두려움을 재현함으로써 그러한 종류의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김한식 역, 펭귄클래식, 2010년 특별양장본)
문법구조를 최대한 살려서 직역하면, “그러므로 비극이란, 고귀하고 완결된 행위의 모방이며, 일정한 규모를 갖춘 것으로, 작품의 각 부분에서 각각 다른 종류로 ‘맛을 낸 언어’를 수단으로 삼고, 단순한 서술(아파겔리아스, ἀπαγγελίας)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하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며, 연민과 두려움을 통해 그러한 정념들의 정화를 완성하는 것이다.”
Λέγω δὲ ἡδυσμένον μὲν λόγον τὸν ἔχοντα ῥυθμὸν καὶ ἁρμονίαν καὶ μέλος,
τὸ δὲ χωρὶς τοῖς εἴδεσι τὸ διὰ μέτρων ἔνια μόνον περαίνεσθαι καὶ πάλιν ἕτερα διὰ μέλους.
[여기에서] ‘맛을 낸 언어’란 리듬과 선율, ”각기 다양한 종류”라 함은 어떤 부분은 운율만으로 되어 있고 어떤 부분은 반대로 노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김한식 역, 펭귄클래식, 2010년 특별양장본)
직역하면, “나는 ‘맛을 낸 언어’(ἡδυσμένον λόγον)이라 말할 때, 그것이 리듬(ῥυθμός)과 조화(ἁρμονία)와 멜로디(μέλος)를 지닌 언어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분마다 서로 다르다(χωρὶς τοῖς εἴδεσι)’는 것은, 어떤 부분은 운문(μέτρα)을 통해서만 완성되고, 또 다른 부분은 노래(μέλος)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뜻이다.”
(49b31)
Ἐπεὶ δὲ πράττοντες ποιοῦσι τὴν μίμησιν,
πρῶτον μὲν ἐξ ἀνάγκης ἂν εἴη τὰ μόρια τραγῳδίας ὀκτὼ μέρη·
ἔστι δὲ μελοποιία καὶ λέξις·
ἐν τούτοις γὰρ ποιοῦσιν τὴν μίμησιν.
Λέγω δὲ λέξιν μὲν αὐτὴν τὴν τῶν μέτρων σύνθεσιν,
μελοποιίαν δὲ τὴν δύναμιν φανερὰν ἔχει πᾶσαν.
재현의 저자는 행동하는 등장인물이므로, 우선 볼거리의 구성이 비극의 필수적 요소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다음에는 재현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인 노래와 언어적 표현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언어적 “표현”이란 운율의 배열 그 자체를 뜻하며, “노래”라 함은 그 의미가 자명하다. (김한식 역, 펭귄클래식, 2010년 특별양장본)
역시 직역해 보자면,
그리고 모방은 ‘행동하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비극을 구성하는 부분은 필연적으로 여덟 가지가 된다.
그 중에서 ‘멜로포이아’(μελοποιία, 음악 구성)와 ‘렉시스’(λέξις, 언어 표현)는
실제로 이 모방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이다.
여기서 ‘렉시스’란 운문의 배열이며,
‘멜로포이아’는 말 그대로 눈에 드러나는 음악적 표현 능력이다.
(49b36)
Ἐπεὶ δὲ πράξεως ἐστὶ μίμησις, πράττεται δὲ ὑπὸ τινων πραττόντων,
οὐκ ἀνάγκη μὲν εἶναι τούτους τινας ἤθους τινὸς καὶ διανοίας·
διὰ γὰρ τούτων καὶ τὰς πράξεις εἶναι φαμέν, ποίας τινάς·
πεφυκέναι αἴτια δύο τῶν πράξεων εἶναι, διάνοιαν καὶ ἦθος·
καὶ κατὰ ταῦτας καὶ πράξεις εἶναι πάσας.
비극은 행동의 재현이고 그 행동의 주체는 행동하는 등장 인물이며, 이들은 반드시 성격과 사상의 측면에서 일정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실제로 우리는 성격과 사상을 통해 그들의 행동의 품격을 판단하며, 행동에는 사상과 성격이라는 두 가지 자연적인 원인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것도 바로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이다.), 줄거리는 바로 행동의 재현이며 (나는 여기서 “줄거리”를 사건들의 조직이라고 말한다), 성격은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의 품격을 판단하게 해주고, 사상은 말을 통해 어떤 주장을 내세우든지 준칙을 진술하면서 드러나는 모든 것이다. (김한식 역, 펭귄클래식, 2010년 특별양장본)
직역하면,
비극이 ‘행위’의 모방이고, 그 행위가 어떤 행위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라면,
그 행위자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성품(ἦθος)’과 ‘사유(διάνοια)’를 지닌 존재여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을 통해 행위의 성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행위의 원인은 두 가지, 곧 성품(ἦθος)과 사유(διάνοια)이며,
모든 행위는 이 두 가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2010년 펭귄클래식판은 프랑스어를 거친 번역본입니다. 츠베탕 토도로프가 머리말을 쓰고, 서문 및 주해를 로즐린 뒤퐁록과 장 랄로 두 분이 담당하였지요. 펭귄클래식 100권 출간 기념 특별판이었는데, 책 속에 그리스어 원문을 장마다 나란히 실어 두었습니다.
한국어판 번역자는 프랑스어 편찬자의 표현을 모두 똑같이 옮겨 실었습니다. 괄호 속 내용이 추가된 건 이런 까닭입니다.
아무튼 시학의 제6장은 에토스(성품)와 디아노이아(사유)를 가진 자만이 행위자이고, 그 행위자의 행위의 원인이 곧 에토스와 디아노이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행위의 원인이 성품이나 사유이지 다른 데서 비롯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모든 사건이 행위인 것은 아닙니다. 지진이나 화산폭발은 사건이지만 행위가 아닙니다. 거기서 대응하는 행위자의 행동이 행위이지요.
그리고 괄호 속에서 프랑스어 번역자가 계속해서 “줄거리”라고 부르는 것은 뮈토스(μῦθος, mŷthos 또는 mýthos)인데, myth라는 영어로 이어져 ‘신화’라는 뜻으로 익숙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 모든 이야기는 뮈토스이고, 아무 말이나 이야기는 아니며 말하자면 플롯(plot), 어느 정도 얼개를 갖춘 이야기만이 뮈토스로서 자격을 갖습니다. 여기서 역사가 떨어져나오고, 다시 여러 갈래의 글쓰기와 글이 구분되었지만, 그 어느 것에도 포섭되지 않는 본래의 것이 남아서 myth로 남고, 동아시아에서는 이를 신화(神話)라는 역어(譯語)로 담은 것이지요.
그리고 이 뮈토스, 줄거리는 에토스, 성품과 디아노이아, 사유에 이끌려 전개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전개하는 것이 음악적 언어라고 단정합니다. 곧 시극(詩劇)은 본래적으로 미메시스(μίμησις, mímēsis), 모방/재현/흉내이고, 이 흉내내기가 모방하고 드러내는 것은 뮈토스, 이야기인데, 이 줄거리는 렉시스(λέξις, léxis) 곧, 언어요 표현, 말하는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 언어는 반드시 음악적이어야 합니다.
번역자에 따라서 6장에 등장하는 이 음악적 언어를 ‘아름답게 꾸며진 언어’라고도 말하지만, 제가 소개한 판본은 거의 직역하여 “맛을 낸 언어”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맛을 냈든 “맛을 낸 언어”라는 표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적극적으로 왜곡해서 써 먹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진실을, 그것이 천상의 사실이든 지상의 사실이든 제대로 표현(모방/재현)해 내려면 이야기에 실어서 전달해야 하고, 어떤 파편으로 전달하든 이야기로 만들어 이해하고 기억, 저장하게 되며, 이야기는 언어로 이루어지는데 오직 ‘맛있는 언어’, ‘맛깔진 말들’로만 성립 가능하다고.
맛없는 말로 지껄여두고는 내가 침 좀 튀겼다고, 목 좀 아프다고 상대가 알아듣기를 바라거나, 심지어 설득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지[感動] 못한 나를 탓하지 움직이지 않고 열지 않은 상대를 탓하지 않겠습니다. 그대도 그러면 어떨까요? 이건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 데 더할 나위없이 좋은 방법이랍니다.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休
*
Ἀριστοτέλης (Aristotélēs)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은 그 안에 이미 최고의 목적, 최고의 목적을 가진 자, 또는 “탁월함에 이르는 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리스토스(ἄριστος, áristos)가 “가장 뛰어난, 최고의”, 텔로스(τέλος, télos) = “목적, 완성”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
『시학』은 그리스어로 Περὶ ποιητικῆς (Perì poiētikês)인데, 이를 직역하면 “시(詩, 창작)에 대하여(On Poetics)”입니다. περὶ (perì)가 “~에 관하여 / ~에 대하여”를 뜻하는 전치사이고, ποιητικῆς (poiētikês)는 “창작의, 시적인, 시예술의”라고 옮길 수 있는데, ποιητική τέχνη 즉, ‘시적 기술/예술’에서 파생한 낱말입니다.
익숙한 Poetica(포이에티케, Poetics)라는 제목은 라틴어 번역본으로부터 널리 퍼진 것이지요. 여기서 보듯이 『시학』은 현대 학문이 분류하는 ‘시’라는 갈래에 국한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신을 향해 고양되어 가장 신적으로 하는 활동, ‘창작’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의 순수성 내지 완전성을 담보하는 것으로서 신에게 바쳐지는 예술의례 즉, ‘연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희곡론’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시학’으로 정착한 것은 최초의 예술로서 의례가 시와 연극의 결합 형태였고, 여기서부터 무수한 예술이 분화했기에 최초의 것은 정신을 전달하는 언어 자체에 있기에, ‘시’를 그 대표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