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시와 현실

詩와 詩人(시와 시인)

by 이제월



소광희 역, 하이데거의 『詩와 哲學』(시와 철학)은 1977년 박영사가 펴낸 작은 문고판 도서입니다.

저는 스무 살에 이 책을 발견하고 아끼고 아껴 읽었습니다. 문장의 반절이 한자여서 훈독을 아는 데도 애를 먹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커피를 쏟은 것처럼 짙게 눌은 종이에 촘촘하게 박힌 작은 글씨들을 사랑하는 건 일체의 꾸밈 없이 진리만 좇겠다는 서원(誓願, vow)처럼 보여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접한 이후 재미나게도 반복적으로 거의 항상 『詩와 現實』(시와 현실)이라고 기억했습니다. 그때마다 ‘아, 아니었구나’ 발견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시금 “시와 현실”이라고 “시와 철학”을 바꾸어 기억하곤 하였습니다. 그건 아마도 제목이 전부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인상이 자꾸 머릿속에서 보정한답시고 윤색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시와 현실’로 생각하거나 ‘시와 철학’으로 생각하거나 이 제목은 이 책의 이야기의 절반만 가리킵니다. 나머지 절반은 사실 ‘시와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횔덜린(J. Ch. F. Hölderlin)의 시 「빵과 포도주」 속 싯구 “wozu Dichter in dürftiger Zeit?” 즉, “이 궁핍한 시절에 시인이란 무엇인가?”가 릴케를 추모하는 하이데거의 강연 제목으로 소환됐고, 하이데거의 이 강연 원고가 이 책에도 수록된 것입니다.

릴케가 쓴 편지들의 매력에 푹 빠졌지만 칼로 푹 찌르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잦습니다. 그 충격과 고통에도 계속 읽어가게 하는 게 시인이 쓴 문장이 지닌 힘이었습니다. 오늘의 주제와 관련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여러 역자의 번역을 소개하겠습니다.


“(……) 아무도 당신에게 충고를 하거나 도와줄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단 하나의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에게 글을 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찾아내십시오. 그것이 당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펴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글쓰기를 거부당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를 스스로에게 고백해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이 맞는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송영택 역)


“(……)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를 해주거나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파고들어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라고 명령을 내리는 그 근거를 찾아보십시오. /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당신의 가슴 길숙한 곳으로부터 뿌리를 뻗어 나오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글쓰기를 그만두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수 있는지 자문해보십시오. 조용한 밤중에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말입니다. 나는 반드시 글을 써야만 하는가 ” (김세나 역)


“당신에겐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나?’ ” (김재혁 역)


그리고 이 구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역시 여러 번역을 나란히 소개합니다.


“마음속을 파헤쳐 들어가서 깊은 대답을 찾으십시오. 만약 대답이 긍정적이라면, 만약 당신이 이 진지한 물음에 굳세고도 단순하게 ‘나는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대답할 수가 있다면, 그때에는 당신의 생활을 이 필연성에 따라 구축하십시오. / 당신의 생활은 가장 하잘것없는, 가장 사소한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 절박감의 표시가 되고 증명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에는 자연으로 다가가십시오. (……)” (송영택 역)


“그러고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대답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만일 마음속 대답이 그렇다고 하거나, 그 진지한 물음에 대해 글을 쓰지 않으면 차라리 죽을 수밖에 없다는 확고하고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다면, 당신의 생애를 그 필연에 따라 만들어가십시오. // 하찮고 쓸데없는 순간 하나하나까지 당신의 모든 순간이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의 표식이자 증거가 되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연을 가까이 하십시오. (……)” (김세나 역)


“깊은 곳에서 나오는 답을 얻으려면 당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가십시오. 만약 이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즉 이 더없이 진지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있으면, 당신의 삶을 이 필연성(必然性)에 의거하여 만들어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 그런 다음 자연을 향해 다가가십시오. (……) (김재혁 역)


시를 쓰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시인이 될 이유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쓰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시인상이 존재하는 줄 압니다. 이게 유일한 견해일 리가! 그러나 말하자면 숱한 언설(言說) 중 올바른 건 이뿐입니다. 다르게 정의 내린 이들조차 — 그가 진정 시인일 때에 — 본인이 깨닫지 못할 뿐 또는 타고난 조심스러움으로 몸을 사리고 의심하는 것일 뿐 바로 저런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릴케의 정의, 제한, 마침표(definition)를 따르건 말건 아니, 알건 모르건 그런 시인들을 나는 보았습니다. 일부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고, 일부는 따로 그렇게 부르지 않고 있지만 — 즐기던 일이 괴롭고 역겹게 된 뒤에도 여전히 기뻐하고 이 숙명의 굴레를 감사하는 이들을. 그런 이들은 말하지 않을 때에도 시인입니다. 차리라 시가 그라는 참 시에서 묻어난 가루나 칠 같다 여겨지리만큼 그들은 아름답습니다. 고요하고 힘차고 제자리에 섰고, 제 길을 갑니다. 그것이 고된지 달콤한지는 불문(不問)입니다.

아, 내가 신이라도 곁에는 시인을 두겠어요. 장님이요 벙어리에 귀머거리, 앉은뱅이인 그가 웃고 가만히 멈출 때에 같이 숨 멎고 이 세계를 마실 것입니다.


이 궁핍한 시대, 존재의 가려진 뜻이 숨어 드러나지 않는 때에, 더욱이 거짓들을 뿌려 그 위를 덮어 더 찾을 수 없게 하는 시대라면 시인은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시인 자신이 시일 때 그가 하는 것, 그가 있음이 모조리 시가 아니겠습니까? 시[라고 부르는 거]를 쓴다고 시인이 아니라, 그가 시인이므로 그가 쓰는 것은 모두 시가 아닙니까? 시는 그의 심장이 울리는 박동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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