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말하는 자유
그러니까, 방점은 ‘말하는’이 아니라 ‘진리를’에 찍힙니다.
목적어에 찍히고,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의 온전성에 찍히며
의도가 아니라 사실에 찍힙니다.
그대가 누릴 자유, 우리에게 허락된 것, 우리가 당당하게 요구하고
반드시 얻어 누릴 수 있는 것은
바꾸어 말해서 권리요 의무요 가능한 꿈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내가 왜 깨끗해야 합니까?
나는 더럽다, 저것이 깨끗하다,
깨끗하단 건 저런 거다
말하면 안 되나요?
내가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래도
진리를 가리켜
진리라고
참된 것이 참되다
아름다운 게 아름답다
거룩한 것이
저것이외다
외치면 안 된단 말입니까?
누가 무슨 까닭으로
무슨 권리요 무슨 권한으로 그런단 말입니까?
이것이
아비를 아비라 부르겠다는
홍길동류 갈망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옳은 게 옳다
맞는 게 맞다
나은 게 낫다
하여 그르치거나 추하단 말입니까?
내 불완전을 핑계로 사과더러 사과가 아니라 하고
저이가 결백하다 알고도
내 어찌 말할 수 있느냔 말이오, 나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지 하며 물러나는 것이
아름답단 말입니까?
상대적인 건 없습니다.
상대적인 건 틀렸다는 고백이요 진단에 불과합니다.
상대적이라면 주관적이고 문제를 일으킬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상대적인 게 아니라 ‘관계적’인 겁니다.
아니, 도대체 어쩌자고
아인슈타인 영감이 Theory of Relativity라고 한 것을
관계성 이론이라고 안 하고 상대성 이론이라고 한 겁니까?
Common sesne를 공통감각이라고 하지 않고
상식이라고 옮긴 건 또 뭐고요?
이토록 유연하고 탄력 넘치는 말들을
깍두기 썰어 벽돌 쌓듯 생긴 건 뭉툭하고 끝은 날카롭고 뾰족해 다치기나 좋게 만든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내가 추해도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고 하고
내가 불편하고 부끄러워도 옳은 건 옳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관계입니다.
진리와 올바르게 관계 맺고
아름다움과 올바르게 관계 맺는 게 뭐 어떻습니까?
올바르게 관계 맺는 게 참된 거고, 선한 거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다운 척, 선한 척, 올바른 척
욕 먹을 자리, 욕 볼 자리 피하는 게 예쁜 게 아니고, 착한 게 아니고, 하물며 바른 것이야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타고난 자유는 하나뿐입니다.
다른 모든 게 조건에 얽매인 일종의 능력들일 뿐 우리 본성은 아닙니다만
이것은 우리의 자유, 권리요 본성으로 타고난 것.
그대는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진리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때라도.
왜냐하면 진리가 진리인 건
모든 것과, 그 어느 것과든 거리가 영(零, 0)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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