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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주님의 기도 (마태오복음 6장 11절)

by 이제월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ton arton hēmōn ton epiousion dos hēmin sēmeron)

— Κατὰ Ματθαῖον εὐαγγέλιον 6, 11.

(Kata Mattháion euangélion)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마태오가 전한 복음 6장 11절.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친 기도를 가리켜 <주님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현재 전해지는 정전(正典, canon) 목록은 네 개의 복음서를 공인하고 있는데, 신약 정경 목록은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개신교 어느 교파든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 경전들 중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마르코복음사가가 전한 복음이 가장 이르고(65-70년경)

이를 공통자료로 활용하여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이 쓰여졌으며(80-90년경)

요한복음은 맨 나중에 쓰여져(90-110년경) 신학적으로 가장 발달된 형태가 되었다고 봅니다.

마태오복음은 마르코복음 외에 Q자료, Q문헌을 함께 사용했는데, 이는 원형이 발견되진 않았으나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학자들이 예견한 문헌으로 예수의 생애, 내러티브는 없고

주로 그의 말씀들, 로기온(λόγιον, lógion)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루카는 마르코복음과 Q자료에 더해, 나름의 고유자료들(L)을 보태어 쓰여졌다고 봅니다.

(다만 복음서의 집필순서는 남아 있는 사본들의 연대와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사본들의 연대는 신약 사본 전체로는 요한복음의 P52(파피루스 조각들에 새긴 사본들에 번호를 매길 때 P를 앞에 붙입니다)가 약 125년경 쓰여진 것으로서 가장 빠르고, 복음서 중 마태오복음 26장 부분을 담은 마태오 P64/P67(150-200년경)이 루카복음 3장에서 24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 15장을 담고 있는 P75와 더불어 비교적 이른 시기 적힌 사본입니다. 막상 마르코복음서는 저술 시기는 가장 빠르지만 남아 있는 사본의 연대는 오히려 늦습니다. 4장에서 9장, 11장에서 12장 등을 담은 P45가 3세기초(200-250년경), 2장 1절부터 26절 일부를 담은 P88은 4세기 초에 쓰여졌지요.


아, 중요한 건 이런 부분이 아닙니다. 저는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실린 복음서는 마태오와 루카 두 편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6장 9-13절에 산상설교(5-7장 전체가 산상설교) 가운데 포함돼 있고, 그러니까 대상 청중은 제자들과 대중이 됩니다. 현대 교회에서 예배/전례에 쓰이는 기도문은 대부분 마태오복음서 버전이 굳어진 것입니다.

루카복음서 11장 2-4절에 남아 있는 형태는 청자가 ‘좁은 의미에서의 제자들만’으로 더 협소합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주님,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예수가 짤막하게 가르치신 기도로 등장합니다. 이 기도문에는 “하늘에 계신” 하며 시작하는 도입구가 없이 단순히 “아버지…” 하며 시작합니다. 장엄한 후렴구(“나라와 권능과 영광이….”)도 없고, 아무튼 간결하고 실천적인 형태입니다.

동서방을 막론하고 교회 예식(ritual)의 표준형으로 이어진 마태오복음 6장 9절부터 13절 사이에 실린 7개의 간구는 가장 완전하고 예배적인 형태로 제시되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구절들은 당연하게도 ‘번역’된 구절이 ‘원문’의 모든 결을 다 담아 전하진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것치고는 많이 간과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야기하려 들면 책을 써도 모자랄 테지만, 저는 전문 연구가가 아닙니다. 조금 공부했고, 조금 관심을 가진 것뿐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생각을 확장하고 귀 기울일 정도의 단상을 적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ton arton hēmōn ton epiousion dos hēmin sēmeron)

— Κατὰ Ματθαῖον εὐαγγέλιον 6, 11.

(Kata Mattháion euangélion)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마태오가 전한 복음 6장 11절.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톤 아르톤 헤몬 톤 에피우시온 도스 헤민 세메론.

이 구절을 단어 그대로 직역해 볼까요?

“그 빵을, 우리의 빵을, 존재에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오늘.”


아르톤, 기본형 아르토스(ἄρτος)는 ‘빵’ ‘식량’ ‘양식’을 뜻합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주로 먹는 식량이 보리빵이었으니

보리빵, 빵이라고 옮겨도 되겠지만, 우리가 ‘밥 먹고 산다’, ‘밥은 먹었니’ 하고 물을 때

생존을 위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양식을, 끼니를 이었는가 묻는 것인 것처럼

아르토스는 기본 생존 수단, 생명을 잇는 무언가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게

덜 경직된, 자연스러운 이해일 것입니다.

요한복음(6장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빵이다” 할 때에도 이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에피우시온, 기본형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이곳, 주님의 기도에서만 딱 한 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저는 이 구절에 오늘 집중합니다.


다른 용례가 없다 보니까 고대부터 해석이 분분합니다.

먼저, 대중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a) 성경을 번역한 히에로니무스(=예로니모, 제롬)는 라틴어 quotidianum(매일의, daily)를 번역어로 택하였고, 오늘날 가장 널리 선택되는 번역입니다.


다음,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초대 교회의 교부들 중에는 ἐπὶ + οὐσία 로 단어를 풀어서 이해했습니다. 헬라어 우시아(οὐσία, ousia)는 라틴어로 숩스탄씨아(substantia), 에쎈씨아(essentia)로 옮기는데, 본래 그리스말로 ‘자기가 소유하는 것’ 즉, 재산이나 소유물을 뜻하는 일상어였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추상적인 철학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신학에서 핵심용어가 되었습니다. 주로, 존재, 본질, 실체 등으로 옮깁니다.

존재 (Being):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공통된 모습이나 근거로서의 존재 자체를 의미하고.

본질 (Essence): 사물의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속성이나 참된 모습을 가리킵니다.

다음 용어가 좀 더 어려운 개념일 텐데,

실체 (Substance):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합니다. 라틴어 숩스탄씨아(substantia)가 이 말입니다.

철학자나 신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사용하는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신의 본질을 설명할 때에 이 우시아(οὐσία)를 주요하게 사용합니다.


세 번째 해석은 더 소수의 입장으로서 에피우시오스를 에피우사 헤메라(ἐπιοῦσα ἡμέρα), 즉, “다가오는 날”에서 파생한 말로 이해합니다. For the coming day.


위 세 해석은 그것이 현재든, 미래든,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든 다른 어떤 차원을 아우르든 아무튼 생명/존재 혹은 생명/존재의 핵심 근거, 기체(基體, substantia, substance)를 위한 신적인 공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존재를 존재케 하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서 있게 하는 무언가인데, 그 무언가는 우리의 힘이나 기술로서 주어질 수 없으며 ‘신적’인 것으로서, ‘신적’인 방식으로 ‘공급’되는 무엇이라는 것이지요. 현재와 미래의 양식이라고 하든, 현재와 미래 생명을 위한 신적 하사, 신적 공급이라고 하든.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이 한 마디가 이렇게 복잡한 말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할 때, 일용한다는 건 이 양식 없이는 우리가 존립할 수 없는, 우리가 중단하지 않고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꾸준히 공급되어야 할 무엇이다, 라는 뜻을 지닌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구절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도스(δὸς)는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명령법 문장을 이룹니다. 당장 달라는 뜻이지요. 지체 없이 달라는 말. “지금 이 순간 주옵소서!” 도스는 이 명사구 — 도스 헤민 헤메론(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을 수렴하는 동사입니다.

세메론(σήμερον)은 “오늘”입니다. 특히, 고대 지중해 동부 지역, 옛 페니키아 인들의 활동영역이며,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가 들어서 있는 이 지역에서는 ‘오늘’이라는 말은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유일하게 선사된 것으로서, 말하자면 내일 일까지 미리 불안해하지 않고, 오늘 하루를, 그 하루의 필요를 신에게 맡긴다, 의탁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냥 ‘이 날/오늘’이 아니라 이것이 전부인, 주어진 것, 주어진 전부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지녔나요?

나를 나이게 하는 것, 내가 나로서 유지되게끔, 내가 나답게 오늘을, 전부인 듯 살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대는 그것을 가졌습니까?

그 하나를, 가졌는가요?


이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황금이든 영예로운 면류관이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미 우리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디에도 없고 사라졌다면.


그대의 일용할 양식은 무엇입니까?

그 일용할 양식을 바라는 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 분명히 알게 된 것처럼

어떤 종교나 신앙을 지녔는지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나에게 절박한 일입니다.

바치지 않을 수 없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가 그렇듯이

기도는 나를 꿰뚫고서야

나를 꿰어서야

비로소 하늘에 계시든 땅에 오셨든

어느 누구에게 다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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