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 노래 같이 읽기(여행스케치 곡)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 노래 같이읽기
제목: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
수록: 제4집 《다 큰 애들 이야기》(1994년 출반)
작사․작곡: 조병석 (몇몇 자료는 이 앨범 중 이 노래만 작사․작곡 여행스케치라고 적고 있음)
노랫말 — 읽기글
말에서 글로 간다.
살아 있는 것이 포획되어 정지된다. 그러나 그것은 대신에 유한성 대신 영원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주고-받음.
우리 서로 갈 길은 다르지만
이 시간만큼은
욕심을 버리고 함께하고파
비록 우리들의 겉모습과 표현은 달라도
하나될 수 있는 건 아름다운 것
바라보는 것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이젠 아무런 말없이 주고파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 지나간 슬픔은 뒤로 남기고
남아있는 날들 위해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그리 길지만 않은 우리의 삶을
후회없이 살아가고 싶어
(간주)
바라보는 것만으로 서로의 느낌을(버전에 따라 마음/느낌 번갈아 등장)
이젠 아무런 말없이 주고파
서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 지나간 슬픔은 뒤로 남기고
남아있는 날들 위해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그리 길지만 않은 우리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가고 싶어
후회 없이 살아가고 싶어
환상이 아닌 현실. 둘, 다름의 세계.
이 노래는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현실을 긍정한다.
둘의 세계. 달빛처럼 불완전한 해의 투영.
그러나 구별, 성별(聖別), 즉 따로 떼어냄. 소도(蘇塗) ― 성역이다.
사건을 현재화. 현재만이 사건의 자리다.
소도는 성소. 마땅히 경쟁-대립하는 둘의 세계가 아니다. 여기서는 죄인도 해치거나 구속할 수 없다. 탈출구이자 해방구. 현실이 유예되는 곳. 하나의 세계. 표상. 욕심-버림과 함께-함은 오직 동시적이다. 하나만 취하고 하나는 버리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동시성(同時性) — 시간의 장소성. 시공간은 하나로 엮여 있다. 지금 소도는 이 시간이다.
욕심은 경쟁의 원리. 필요한 것을 욕망하는 맑은 데서부터 필요치 않아도 배척하고 선점하는 탁한 데까지 걸쳐 있다.
현실은 ‘비록’의 세계. 이상에 못 미치고 꿈꾸던 게 아닌 세계다. 우리를 거듭 다르게 만든다. [서로] 떨어뜨린다.
다른 것의 ‘다움’은 둘이 셋으로 넘어가는 최초의 경계에 형성된다. 몬이 내는 첫 결로서의 새.
그러나 하나 된다면, 함께한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말미암는가? ‘함께 하고파’라고 노래하다가 슬쩍 그것을 ‘하나-됨’으로 치환(置換, 바꿔치기)한다. 이런 치환, 값을 높임(혹은 낮춤)이 가능한 건 아름다움뿐이다. 그리고 그게 될 때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止揚)한다. 사나운 말을 길들이기. 아름다운 건 초시간적으로 기적(奇蹟)이고, 초공간적으로 신비(神秘)다.
아름다움은 새의 속성. 그런데 하나-됨이 아름다움인 것은 얼이 몬을 지나, 갈라진 몬의 질서를 획득, 정(正, 올바름)으로 사(邪, 어긋남, 치우침)을 잡아 새에서는 둘을 아우른 하나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새는 엉터리 스타일이다. 잘된 스타일은 통일성이 있다. 즉, 장악하고 있다.
그 신비 앞에서 줄거리 ― 시간 속의 유일회적(唯一回的) 사건의 세계 ― 는 사라진다. 대신 절대의 표상, 이미지들이 쏟아져나온다, 춤춘다. 불가피한 일. 노래는 여기서부터 높아지고, 코러스가 들어가다가 마침내 합창으로 바뀐다.
거기서는 바라봄만 가능하다. 노래하는 이는 의아해하지만 그게 전부인 세계에서는 물론 그것이 전부다. 그것이 ‘매개(媒介) 없이’ ‘앎’이 ‘된다’. 추리, 논증, 분석 다 필요 없다. 하지만 진짜일 것. 가짜라면 추리, 논증, 분석을 다 써도 소용 없다.
하나는 다른 해석을 필요치 않는다. 배고프다고 말하지 않아도, 굳이 배고픔이 무언지 알지 않아도, 절로 배고픈 줄을 안다. 느끼는 세계다. 주고-받고가 한 방에 일어나는 세계다. 그것을 신비라 이른다. 얼이 얼다우면 신비롭다. 그윽하다.
그리하여 노래하는 이는 ‘이제’ 아무런 말없이 ‘주고파’ 한다. 알아주고픈데 알았으니 말없이 ‘□’을 주고프다. 주고픈 걸 특정(特定)하지 않으므로 그건 전체로 확장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경계-구획짓기의 소멸. 그러면 주는 것은 자기(自己).
아무런 말없이 주는 것.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 그것은 전체다. 전체는 또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선물 속에서 선물하는 이를 발견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선물을 주고받는 진짜 의미다.
여기서 바라는 건 승리, 소유, 확인이 아니다.
의지, 위로, 사랑 모두 ‘자기’ 증여(贈與)다.
몬은 둘이지만, 둘은 ‘껴안을’ 수 있는 첫째 상태다.
자유롭게 전 존재를 주고-받아야 하므로 과거, 사라진 존재들, 이미 사라졌으나 기억 속에, 집착과 자아감[나라는 생각, 느낌]으로 인해 아직 붙잡고 있는 것들을 뒤로 한다. 보낸다. 놓아준다[Letting go].
불완전함은 슬픔으로 나타난다. 지나간 것, 불완전한 것은(영원한 것은 지나가지 않으므로) 모두 슬프다. 몬이 내는 첫 새. 그러나 그래서 그리워하고, 셋의 방향-새의 결이 하나를 그리고 하나로 흐른다.
존재는 그래서 소멸-무화(無化)하는 게 아니라
미래-미지로 개방된다. 미래-미지를 향하여 할 수 있는 건 물론 개방뿐이다. 그것은 열음도 아니고 열림도 아니다. 의지적인 것도 아니고 자동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열려짐이다. 남아 있는 날들은 ‘열려진’ 것이다. 이중의 수동태. ‘열린’ 것만으로 타력에 의한 것이지만, 그 열림마저 ‘[하여]진’ 것이다. 남아 있는 날들의 정체는 열려진 것, 즉 개방성이다. 개방된 것이 선사된다. 증여의 가장 기꺼운 형태. 선물.
남아 있는 날들은 반드시 미정된 것이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남아 있는 날들이 하나하나 실제로 닥칠 때마다 그것은 오직 ‘하나’로서 현재한다. 남아 있는 날들은 무한히 펼쳐졌지만, 하나로 선택된다. 하나로서만 나타난다. 하나-된다.
그 날들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방법을 비우는 방법이다. 담는 것이 아니라 담기게끔 비우는 것.
새는,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앞으로 더욱 ‘새-롭다’.
그것은 무엇-임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일까?의 꼴로 나타난다. 그러다 무엇-이다!로 체험된다. 미래는 알 수 없는 미지로서 온다. 그러나 일단 펼쳐지면, 그 사이의 의미가 선명하게 ‘엮인다’. 하나-될 것이다. 새롭다. 즉, 새-답다.
첫 번째 반복. 위함(~위해)을 밝히지만, 방법을 밝히지 않은 채 첫 번째로 후렴이 반복된다. 마치지 않은 채 꼬리 물었다.
몬의 운명을 상기. 둘-임.
그러나 다름은 가능성을 역동한다.
빠르게, 분명하게 현실로 내려온다. 한껏 고양했던 곡조도 주저없이 땅으로 착륙한다. 이 하강은 그러나 서글픈 게 아니다. 이미 슬픔은 지나간 것으로 치환했다. ‘지나간 슬픔’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한. 그러나 슬픔을 지나간 것으로 명명(命名, 이름지음)함으로써 거기에 명(命, 질서, order)이 선다. 호명(呼名, 이름 부름)하는 것만으로 이름지어진 것은 부름에 응답한다. 그것은 ‘지나간’ 것이 되어 지나간 세계에 봉인된다. 혹은 비존재(非存在)한다[아니-있어-진다]. 그리하여 길지 않은 우리 삶은 전체로 볼 때 더 줄어들고, 남은 것들의 순도로 볼 때 완전해진다. 산 것들만 살아 남아 살아 간다.
이상향의 체험은 도피가 아니다. 지향이다. 곧, 지향을 드러낼 것이다.
그 남은 삶을 사는 의지는 후회 없기를 바란다. 사실 노래하는 이의 이런 마음, 채 실현되기 전에도 초시간적으로 필연하게 이 증여에 이어진 마음이 이 순간을 가능케 했다-한다.
두 번째 반복은 기도다. 원본까지 세 번의 외침이다. 삼세번은 기원의 흔적이다. 반드시 꼭 실현되기를 바랄 때, 아주 중요한 것일 때 우리는 3과 연결지었다. 머리 검은 겨레는 세계 어디서나 그런 풍습이 남아 있다. 배우지 않아도 몸속에 흘러 자신도 모르게 그리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길지만 않은 우리의 삶을(무엇)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고, 사랑‘-한다’고 하면 이것이 (어떻게)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할 수 있도록’이다. 어떻게인줄 알았지만, 상호 의지-위로-사랑은 겉모습/표현인 ‘그리 길지만 않은 우리의 삶’을 도구와 연료 삼아, 이를 다 써서 소진하여서라도 이루려는 진짜 ‘무엇’이다. 이것은 겉모습과 표현은 달라도 ‘하나될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이다.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 노래의 백미는 예 할 것과 아니요 할 것을 구분하는 것. 다시 말해,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침묵] 하는 것. 그럼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은 이 지혜는 단순한 잔리를 드러낸다. 단순한 진리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알아’보는 ‘서로의 마음’ 안에 있다. 그 마음은 해바라기를 해를 좇듯이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것은 후회 없는 삶(의 모습)인가? 아니면
후회 없이 살아가기 위한 방편인가? 혹은
둘 다인가?
노래하는 이는 모른다. 그는 단지 바랄 뿐. 그러나 노래를 듣는 이는 공감하거나 이해하거나, 함께 빎으로써 ‘안다’. 노래하는 이의 어법이 직접 지시하지 않는 내용을 노래의 전개가 제공하는 형식을 노래의 내용과 함께 청취한 듣는 이는, 선선히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내용은 형식에 담겨 전해지므로, 내용을 전하느라 형식을 지어/빌어 쓴 노래하는 이는 온전히 자각하지 못한 것을 형식 속에서, 즉 형식을 먼저 받아 들고 그 안에서 내용을 전해 듣는(주고-받고 할 때에 주는 이와 받는 이에게 있어서 먼저인 것과 나중인 것이 맞바뀐다) 노래 듣는 이는, 이 노래가 본래부터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 줄로만 안다. 그 메시지는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고 서로 사랑하면 후회 없이 살아갈 거라는 믿음.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장차, 또는 이제껏 서로 갈 길이 다르더라도, 함께 있으며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거라고, 그러느라 함께 있으며,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이것을 엮는 매듭 삼아, 이것으로 엮여서 앞으로도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알아듣게 된다.
이것이 노래다. 노래는 노래하는 이의 불완전성을 넘어서서 듣는 이에게 더 넓은 지평을 준다.
하나는 자기[self], 둘은 세상[world]인데, 셋은 다른 자기이며, 신[God]이다. 그래서 모든 노래의 최종 수신자는 신이다. 우주 자신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도 무한히 노래하고-듣는다.
이것이 예술이다,
새다,
셋이다.
하나가 둘로 쪼개질 때, 그것을 다투게 버려 두지 않고 서로 껴안게, 서로 부대끼게 자꾸 맞대주면, 어느새 그것은 여러 모로 사이-지고, 이 사이-짐이 점점 하나의 사이를 만든다. 둘은 엮여서 새로운 하나가 되어간다. 거기서 결 고운 새가 나온다.
이제야 얼은 몬을 거쳐 자신의 목적, 즉 운명을 성취한다. 얼의 운명은 새로워지는 것이다. 새로운 새는 주어진 것에 없던 새로운 것을 갖는다. 그래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다. 그것은 잉여이며 초과의 존재이다.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새로운 얼이 일어선다.
기도(祈禱)하는 존재의 자기-선취(先取, 앞당겨 받음/먼저 얻음).
이 노래를 한 줄로 줄여 풀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기도하는 존재, 기도한다는 것은 존재를 던진다는 뜻이다. 어느 과녁을 향해 쏘아 올리는 행위, 그런데 그것이 자기 자신일 때, 그것을 기도라고 한다. 그리고 기도는 자기를 자기 밖으로 쏘아 보냈기 때문에, 자기를 초과하고 그 잉여로 공동체를 이루며, 그 초과로 자신을 새롭게 정립한다. 나-일뿐이던 나는 내가-아니게-되어 비로소 참으로 내가-된다. [주체성→객관성→상호 관계성] 이 노래는 한 시기를 마감하며, 다른 시기를 시작하는 ‘매듭’의 시기, 9학년 즉 열여섯 무렵의 친구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여행스케치 최대의 장점은 그들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 소박함과 꾸밈없음으로 해서 그들의 노래는 대개 삶의 진실을 거짓 없이 비추어낸다. 실제로 삶의 국면에서 자기 마음을 담아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많이 짓고 불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행스케치는 4집에 이르러 이 노래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를 지어 부르고, 이후 5집 남준봉 편을 필두로 멤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솔로 앨범을 만들 계획이었으나 계속해서 실행하지는 못한다. 여행스케치 리더인 조병석은 전형적인 ‘교회 오빠’다. 여행스케치는 그렇게 개인적 친밀함으로 모였고, 자신들이 노래 때문에 모였는지 여행 때문에 모였는지 불분명할 만큼 혹은 중요치 않을 만큼 여행하러 모였고, 그래서 팀의 이름도 여행스케치라고 하였고, 여행을 스케치하여 ‘듣는 이가 자신들의 실제 여행에 함께하는 것 같은’ 체험을 들려주고 싶어서 음악 작업을 하였다.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어 ‘가수’로서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팀의 문을 두드리고 합류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원래의 색채를 오랜 시간 지켜내었다. 그들은 장소를 여행할 뿐 아니라 시간, 자기들의 인생을 여행하면서 평범한 사람이 흔히 하는 약간의 과장은 할지언정 아티스트나 유명인이 갖는 허영을 뽐낸 적은 없다. 적어도 7집까지 그들의 노래는 투명하다. 거기에는 최소의 색만 입혀진다. 장례때 입는 옷을 소복(素服)이라고 하는데, 素는 ‘희다’는 뜻으로 새긴다. 그러나 이 새김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하양색깔을 가리키지 않는다. 아무것도 덧입히지 않은, 물들이지 않은 순수한 바탕색이다. 여행스케치의 노래는 자연의 빛깔, 실제 삶에서 겪은 감정의 빛깔대로 어떤 색은 있지만, 그것은 ‘희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