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시와 현실

거인을 부른다(김재진 시 거인에 붙여)

by 이제월


김재진 시 <거인>을 생각한다.

북촌 한옥 마을의 골목 어딘가를 헤매다 보면 벽을 대신한 거대한 창유리 위로 하얗게 쓰인 글씨들을 처음 마주친 순간을 기억한다.

흐린 하늘 아래서 잿빛의 골목을 거닐며 비를 머금은 구름을 닮은 연한 먹빛의 아니, 희검던가, 그러한 벽돌로 비탈에서 튀어나와 한 번 치어다 보라고 내민 듯한 얼굴의 집에서 이 시를 읽었더란다.



거인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을 구하는 것이라 여기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 할 때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 속에서 더 이상

내 안을 비추는 따뜻한 빛 찾을 수가 없을 때

답답함이 세력을 얻어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내일이 안 보이는 깜깜함에 갇혔을 때

어딘가에 매달려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어하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한때 내가 미워했던 사람과

한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모든 벽들과

벽들이 갈라놓은 질식의 공간과

저녁의 식사와 아침의 푸른 공기 사이에 박혀 있는

갈구(渴求)의 절박함

그러나 기도는 뭔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네.

기도는 또 하나의 나

내 안에 숨어있는 거인을 불러내는 일이라네.


詩 김재진




거인은 대체 무엇인가.

시인도 묻는다.



<거인>이라 제목을 쓰고서

첫 줄부터 묻는다.

그러나 거인을 묻지 않고

기도를 묻는다.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을 구하는 것이라 여기네.


이 생뚱맞은,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왜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서두(序頭)는 곧장

감추지 않고 저를 풀어 보인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 할 때


그러나 왜 무기력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런다는 건 알겠으나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해도 아무 힘도 못 쓰는 일이 한두 가지던가.

세상엔 해서 되는 일보다 해도 안 되는 일이 더 많은데?

무기력한 까닭은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정말로 바랐기 때문에

그 할 수 없음이 정말로 다가와 무기력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철저히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력하다 느낄 때가 아니고

무기력할 때.


무기력할 때는 또 있다.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그러니까 무기력은 가깝거나

가깝기를 바란 이와 상관한다.

죽음이건 버림받음이건,

저가 떠나건 저가 나를 떠나보내건

떨어짐—떨어트림.

분리와 단절에서 비롯한다.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 속에서 더 이상


시행(詩行)은 한 번에 잇지 못한다.

“더 이상”이라는 말은 뒤에 ‘부정’의 말을 이끈다.

그러므로 눈동자 속에 있지 못하는, 머물지 못하는 비참함이 자아내는 비통(悲痛)은

말을 이을 수 없다.

그러나 말해야 한다.

그리고 시인은 말할 수 있는 지점까지 건너갔다.


내 안을 비추는 따뜻한 빛 찾을 수가 없을 때

답답함이 세력을 얻어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빛과 숨은 같다. 하나다.

체온과 호흡이 대사(代謝)를 일으킨다.

신진(新陳)케한다.

그리고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들은 “세력”이다. 그런데 시인은

답답함의 세력이라거나, 답답한 세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시인이 택한 시어는 “답답함이 세력을 얻어”다.

작은 것이 커지고, 따로이던 것들이 무리를 이루고

반목하던 것들이 악의로 뭉친다, 혹은 그렇게 여겨진다.

그러면

숨조차 쉴 수 없게 된다. 그러한 때.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에서 나를 비추어 주는 따사로운 빛을 찾을 수 없을 때,

[그런] 답답함이 세력을 얻어 나를 조여오고 숨 쉴 수 없을 때,

마치 칸나 전투에서, 탄금대에서 저편이 조여오고 이편이 압사하던 때처럼.


내일이 안 보이는 깜깜함에 갇혔을 때


그럴 때는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

내일이 안 보이는 어둠에 갇힌다. 까무룩하다. 검다.


어딘가에 매달려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어하네.


그러면 우리는, 그들 — 사람들은 어디에건 매달려 기도하고 싶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는 건 다 잡는다.

계산할 것도 가릴 것도 없다.

다만 기적이라도 일어나야 한다.

그러길 바라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

믿지 않고 살다가도

믿고 싶어한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한때 내가 미워했던 사람과


이쪽도 저쪽도

인력도 척력도

생의 구심력도 원심력도

똑같이 나를 숨막히게 하는 세력이다.

“한때”일 뿐 더는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이들조차

새삼 달려들고 나를 나무란다.


한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모든 벽들과

벽들이 갈라놓은 질식의 공간과


무엇 때문이건 그 벽들, 나를 가로막고 — 정확하게는, 내가 넘을 수 없던

그 벽들과 벽들이 갈라놓은 각각의 고립, 각각의 단절, 각각의 질식 — 숨막힘.

그 공간 — 세계들과


저녁의 식사와 아침의 푸른 공기 사이에 박혀 있는


희망과 안도의 사이에는

아직 내가 살아 있어 저항하고

아직 내가 살아 있어 고통받는 이 속에는


갈구(渴求)의 절박함


아니, 이 속에서

나는 갈구한다. 내가 ‘나’인 데서는 언제나

절박한 갈구가 된다.

기도일까.



그러나 기도는 뭔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네.


그러면 무엇?

기도는 무엇을 바라는 것, 도구이지 않나?

내 손에 쥔 망치나 삽, 곡괭이, 아니, 휴대폰, 스마트폰, …….


기도는 또 하나의 나


시인은 기도가 ‘나’라고 말한다.

기도는 ‘나’다.

나는 이 비참이 전부가 아니고

이 절박한 갈구, 숨막힘, 깜깜함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이 세계의 시민이면서

다른 세계의 시민,

다른 세계를 사는 내가 있다.

현재라면 영원, 이승이라면 저승.


내 안에 숨어있는 거인을 불러내는 일이라네.


그러면 기도는 무엇인가.

즉, 나는 무엇인가.

기도가 또 하나의 나라면,

그러나 나이므로 내 안에 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내 안에 숨어있는” 것이로되,

누구인가 — 누구냐면 나이지만

무엇인가 — 이 사랑하고 미워하고 갇히고 힘들어하는 나? 아니다.

기도하는 내가 마주치는 기도를 듣는 나는

“거인”이다.


기도는 거인을 불러내는 일.

또 하나 나를 깨워 불러내는 일이다.


나는

내가 구할 것이고

나를 믿을 것이다. 지금이 아닌 언제라도

믿게 될 것, 믿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도는

믿어서 하는 게 아니라

믿을 수 있게 하는 일.



외부에서 신이나 천사를 불러들이는

빙의의 예식, 신내림이 아니다.


내면에서 거인을 불러일으키는

각성의 예식, 직시와 현존, 이해와 지각

신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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