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택트(Contact) 2: 낭비에 대하여
이 영화는 유독 ‘낭비’에 대해 자주 말 꺼내요.
Awful.
애로웨이의 아빠도 그런 말을 했고,
팔머 자스도 그런 말을 하고,
(사실 자스가 그런 말을 해서 애로웨이가 마음을 열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애로웨이는 나중에 아이들을 안내하면서도
그 얘기를 합니다.
우주공간은 굉장히 큰데,
거기에 우리뿐이라면 그건
엄청난 공간의 낭비일 거
라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다른 ‘낭비’에 대해 말합니다.
청문회장에서 집약해서 드라는데,
1조 원이나 든, 단일 프로젝트로는 인류 역사상 최디였다는 말이라든가,
그렇게 입장 바꾸어 의심이 들리란 걸 인정할 거라면 애초에 증언을 철회해야 하지 않았느냐라든가……
이런 말들은 모두 ‘낭비’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들이죠.
하지만, 정말로 낭비인 건 무언가요?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은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을 대립시키는 세상 속에서
믿는 까닭은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임을 보여준 데서 왔습니다.
수년이 지나 더 강하게 읽게 되는 건
이 얼마나 굉장한 낭비인가! 하는 점입니다.
Other people. 외계의 지적 존재들은
달랑 한 사람만을 위한 우주선을 마련하고
그 사람을 만나 달랑 한 마디를 해줍니다: (사실은 두 마디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하나는 기술적인 조언이라서.)
“혼자가 아니야.”
애로웨이를 만난 타자(나는 이 글에서 이 표현을 즐겨쓰겠습니다. 他者)는
너희 인간은 참 특별하다면서 아름다운 꿈도 꾸고, 여러 가지 악몽도 꾼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혼자라고,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지만,
실은 너희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그 타자조차 다른 이들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걸 이용할 뿐이고
이런 예산을 낭비하는 어이없는 초대(?)와 접촉을
일억 년 이상 해오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오, 맙소사!!
처음에는 조디 포스터의 명연기에 푹 빠졌고,
자스나 키츠, 드럼린 등 사이에서 나타나는 관계에 눈길이 쏠렸지만
이번에는 이 사건 전체, 이 사건 자체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해든의 투자도 그렇거니와,
해든이 그걸 선물이라고 불렀고,
그 타자가 이를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고 할 때에
나는 앞으로 이어질 엄청난 낭비와 과잉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낭비야말로 —
타자의 이야기 곧, “혼자가 아니야”란 말에 진실성을 부여합니다.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이 있죠.
소통하고 관계맺지 않는다면 그는 부재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낯선 이도 잦은 관계를 맺으면서 ‘이웃’이 됩니다.
작중 타자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의 문명을 파멸이 아니도록 진보시키는 것은
(애로웨이는 단 한 마디 묻는다면 이걸 묻겠다고 했으나 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타자는 답을 한 셈이지요.)
이런 낭비.
하나를 위한 전부,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무한정한 노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이 영화를 재차 보면서 거의 울 뻔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순수한 감동이었습니다.
어떤 것을 이토록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데 대한.
그러나 물론, 모든 낭비가 훌륭한 건 아니랍니다.
우리는 마치 세상엔 인간뿐이란 듯이, 혹은 이 나라에, 이 일에는 나뿐이라는 듯이 굴곤 합니다.
약간의 정도 차이뿐, 튼튼한 울타리를 치고, 이렇게 제한하고 고립하기 위해
이 고립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낭비를 하지요.
이건, 진짜 낭비입니다.
아무런 접촉도 일어날 수 없는 ‘숨는’ 행위이고,
결국 숨 ‘멎[게-하]는’ 행위입니다.
과학자들이 기후 변화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결코 그럴 리야 없지만 참고 삼으라고 작성해 제시한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그러다간 2070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다섯 개의 시나리오가 그린 미래를 경유 중이어서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예고된 미래 중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는데,
다섯 개의 시나리오 어디에도 우리가 밟은 시나리오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더 심하게 많은 탄소를 배출했기 때문이고,
이대로 시베리아 등 동토(凍土)가 녹는다면, 배출될 온실가스는 현재 대기 중 총량의 두 배니까요.
우리가 ‘나 하나쯤’ 하며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았습니다.
인간의 멸종.
이러한 때에 다시 <콘택트>를 보며 나는 낭비에 대해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게으름을 예찬하듯이
나는 낭비를 예찬합니다.
그러나 낭비도 낭비 나름입니다.
어떤 것의 본질을 보려면 그 목적과 의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에 대해서 작동하면 더는 똘레랑스가 아닙니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에 대한 앵똘레랑스여야 하지요.)
그러면 똑같이 도둑을 잡고 이웃을 구한 두 사람이
내면의 수준이 얼마나 다르며, 심지어는 한쪽은 이타적이고 한쪽은 극히 이기적이라는 상반된 방향을 품었다는 걸 발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훌륭한 낭비가 이 세상에 더 많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것이 넘치는 건 나쁜 것이 사라지는 걸 뜻하기도 합니다.
그대가 하는 낭비는 누군가가 모래알을 손바닥에 펼쳐볼 때
별이 반짝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자신만의 성을 쌓는 게 아닌 그런 낭비를 할 때 말입니다.
“사랑한다거나 이해한다는 말까지는 필요없다.
누군가 나를 걱정한다는 말이면 족하다. 진정어린.
마치 약간의 바람이 사그라들던 불씨를 되지피는 것처럼.
그것은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힘이 있다.”
자, 생각해 보아요.
어떤 낭비를 해야 할까요?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