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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 중수, 고수의 길 — 양비론, 양시론을 넘어서

by 이제월


충돌하는 둘 이상의 입장이 있다고 할 때, 해(解)가 없는 ‘삼체 문제’(三體問題, three-body problem)는 관둡시다. 우리가 둘 이상의 문제, 양자(兩者)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거칠게 말해서 ‘양비론’(兩非論)과 ‘양시론’ (兩是論) 그리고 어느 한쪽이 옳고 나머지는 그르다, 적어도 어느 한쪽이 우위에 있다고 우열을 가리는 ‘시비론’(是非論)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중 하수(下手)가 양비론입니다. 양비론이 하수인 데에는 두 가지 큰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언가가 ‘틀렸다’고 진술하기 위해서 그 무언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내가 상대/대상을 이해할 필요없이 그냥 내 생각 하나를 가지고서 나와의 다름, 나와의 불일치에 의거해 무엇이든 틀렸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하고, 비난하기는 무척 쉽습니다. 나의 부동의는 나에게 유보된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다름 아니어서 ‘그거 아니야’라는 말은 본래적으로 아무것도 입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견해, 주장, 입장, 진술이든 ‘불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틀렸다’는 말은 ‘불완전하다’, ‘불성립한다’는 것만 드러내면 되기 때문에 본래 그러한 것을 본래 그러하다고 진술하는 것이므로 너무 쉽고, 나아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 불완전함은 실은 판단의 대상이 되는 입장-들/주장-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판단 주체의 입장과 주장에도 적용됩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페아노 공리계를 포함하는 모든 무모순적 공리계가 ‘참인 일부 명제를 증명할 수 없으며’, ‘특히,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정리입니다. 괴델 이전의 수학과 이후의 수학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수학적 정리조차 이러할진대 하나의 견해가 불완전하다는 걸 드러내는 게 무슨 업적이 되겠습니까?

즉, 양비론은 둘에 대한 무엇함이 아니고 그저 내가 무엇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저 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을 드러낼 뿐이며, 종종 양비론을 펴는 사람은 사실은 대상을 조목조목 헐뜯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발가벗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만 알고 하나만 떠드는 거죠.

중수(中手)가 양시론입니다. 둘 다 맞다는 입장. 이건 매우 훌륭하다고 할 때조차 주장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둘을 안다는 것, 아마도 둘밖에 모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각을 이해했으나 둘을 비교하는 데 실패했음을 뜻합니다. 회피한 것이든 도전했으나 능력이 달리는 것이든 말입니다.

고수(高手)는 이제 알 것입니다. 시비론.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 물론 성공했을 때 말입니다만, 시비론을 편다는 건 둘을 알고, 둘을 견주어 볼 수 있는, 한데 올려 다루는 저울을 지녔다는 것으로서 적어도 ‘셋은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실패했더라도 하나만 아는 하수의 양비론과 겨우 둘 아는 중수의 양시론에 비하여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좀 더 도약하고 있다는, 최소한 도전하고 있고, 하수와 중수의 문제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고수가 될 가능성, 고수와 말은 주고받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양비론이나 펴는 하수인지, 양시론에 피신한 중수인지 들여다보십시오. 의견을 단순화하여 양자 문제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고수의 길을 가십시오. 하수가 가장 변하지 않고, 중수도 변하기 어려우나 고수는 자꾸 변합니다. 배우고 고치고 왕왕 실패하지만 기어코 나아집니다.


고이다 썩는 길 말고, 고단하지만 점점 튼튼해지고, 점점 나아지는 길을 걷기 바랍니다. 자유란, 아무거나 내팽겨쳐져도 되는 것을 뜻하지 않고, 더 나은 걸 선택하고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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