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아니, 인간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 자기보존을 넘어서
생명이 저마다 갖춘 보존 기제와 확장 기제 중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것은 생식과 세대 간 계승이지만, 자연 속에서 단순생식과 자기복제도 쉽게 발견합니다. 물론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스케일도 조절해야 보이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일반 현상의 하나일 뿐인데 우리가 자꾸 잊는다는 것. 특별한 예외가 아니고 다만 나와 좀 더 거리가 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가 더 가깝고 내가 더 멀다는 것.
나무는 매년 일종의 죽음을 겪습니다. 활동을 정지하고 무성하게 피운 잎을 빛바래고 얼리고 떨굽니다. 그것을 담요 삼아 몸통을 재우고 지키다 봄에 다시 깨어나 성장하고 만발합니다. 그리고 다시 가을 그리고 겨울.
종으로서 돌아볼 때, 인간은 두 가지 재미난 도전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몸을 보존하기보다 뜻을 보존하길 택한 것이고, 하나는 나를 살리기보다 우리를 살리기로, 구체적 장면으로는 나를 통하기보다 너를 통해서 생명을 구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왕왕 보존기제가 약하거나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만일 프로이트가 제시한 타나토스 — 죽음에의 충동[Thanatos, 死亡本能/—衝動]이 우리 안에 내재한다는 이론이 맞다면, 생의 욕구[Eros, 에로스]와 죽음의 욕구가 균형을 잃을 때에는 중단없이 파괴로 치닫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이런 충동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고, 어쩌면 아득하게 멀리 날아오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군체가 아니고 개체인데도 놀라운 사회성을 진화의 원동력으로 삼은 겁니다. 단단한 발톱이나 발굽, 털이나 꼬리 같은 걸 죄다 버리고, 홀가분해진 인간은 눈동자를 키우고, 양분을 몰아주어서 머리가 굵어졌습니다. 눈 밝고 머리 굵은 사람은, 이제 혼자가 아니고, 제가 할 줄 모르는 건 남에게 의지하여 살고, 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기꺼이 저를 내던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영원히 깨지지 않을 단단한 연결망 같았습니다. — 인드라망(Indra網).
자기 보존 대신 타자를 보존하는 쪽을 택한다? 이는 자기비하나 자기에 대한 방기(防棄)가 아닙니다. 굴종이나 포기, 피지배의 상태도 아닙니다. 인간은 몸의 감각 대신에 사유, 상상이라는 지렛대를 통해 자아를 확장한 겁니다. 나를 더 크게, 더 낫게, 더 우선하게 치환할 수 있는 일치 대상 즉, ‘우리’를 만든 겁니다. 우리는 나와 타자들로 구성된 무엇, 타자들의 합, 거기에 나는 고작 n분의 1로 들어가 있는 나를 왜소하게 하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이 상징, 이 상징체는 내가 확장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내 몸을 돌보듯, 내 관심사를 돌보듯 ‘우리’에 속한 일원들을 바라보고 다룹니다. 그들은 나의 소중한 일부이지 남이 아닙니다. 물론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지만, 그렇게 느낀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경이(驚異, wonder)-롭습니다.
이 경이가 사람다움의 핵심입니다.
만일 우리의 핵심은 우리를 우리 아닌 다른 것[들]과 ‘구별’한다고 한다면요.
우리는 유일하게, 자기를 자기를 초월해서 확장합니다.
이 초월, 확장적 보존 기제에 꼭 필요한 재료요 동력은 ‘나-아닌-너’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본능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수를 사랑하고, 혐오를 사랑으로 바꾸기도 하고, 원수를 은혜로 갚기도 합니다. 억지가 아니라 평화롭고 선선하게.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진 않지만, 어려움을 넘어설 뛰어남이 우리에게 있다고, 우린 그걸 오래도록 늘 가져왔다고, 이게 우리 종(種)의 가보(家寶)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대에게도 이 특별함이 있습니다. 이 특별함을 발동할 때, 무엇으로도 그대를 협박할 수 없고, 무엇도 그대를 두렵게 하거나, 부자유하게 묶어두지 못합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