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대지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에 대하여

by 이제월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기를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하였다.

— 마태오복음 3장 1-2절.


첫 번째 이야기. 세례자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요한이 광야 즉, 문명이 집약된 중심이 아니라

주변, 소외됐으나 연결은 되는 그런 정도의 외부, 내부와 연결된 외부에서

뉘우치고, 돌이키라고, 삶의 방향을, 생각의 방향을 바꾸라고 외칩니다.

그러면서 그가 근거로 드는 것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다가온 줄을 어찌 안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선포하시기 시작하여 "여러분은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 마태오복음 4장 12절. 17절.


두 번째 이야기. 요한이 잡혀가자 예수가 바통을 건네받습니다.

바통 터치. 합세하는 대신 이어달리기. 계승. 계주.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여러분은>이라고 딱 가리키긴 합니다만, 아무튼 <회개하시오.>

왜?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까.

그러나 다시 — 하늘나라가 다가온 줄을 어찌 안단 말입니까?




✶그러나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달리 지역에 있는 호숫가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그리하여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솟아올랐도다."

— 마태오복음 4장 13-16절.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 사이.

첫 번째 ‘외침’과 두 번째 ‘외침’. 그 바통 터치 사이에, 사후(事後) 얘기지만, 복음사가[evangelist, 복음사가는 작가나 역사가가 아니라 일종의 기자입니다. 하느님을 취재해서 인터뷰를 전달하는 사가라는 특이한 업(業)]는 아무튼 증언을 합니다.

예수가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지.

최소한 복음사가에게 그것은 예언자의 예언이 성사(成事)된 사건입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 그리고 너머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모두 규정해 버립니다. 팩트 폭행이랄까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라니.

어둠 속이라는 현실 규정을 받아들인다 해도

— 부처도 생을 고해(苦海)라고 하는 걸 보면, 뭐 그냥 그 시절엔 이렇게 보는 게 유행이구나 하고 넘어갑시다, 더 깊이 파헤쳐 풀어볼 수도 있겠지만 —

앉아 있는”이란 말이 걸리지 않나요? 좀 거시기하지 않나요?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않고

도전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챘다 해도 자기 할일을 안 하고 있다는 고발입니다.

인정하면 뼈 때리는 말이고,

인정할 수 없다면 심한 모욕입니다.

그래도 ‘남’ 취급하진 않는군요. “백성”이라는 호명은

책임을 느낀다, 우리 중 하나다, 이건 우리 문제다 하고 수용하는 거니까요.

이것도 불쾌하고, 우리가 남이지! 하고 대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일단 이 고비를 넘고 나면,

여기까지 받아들이고 나면

문제의 “하늘나라가 다가왔습니다”의 정체를 맞닥뜨립니다.


복음서 저자인 하느님 취재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고.


또 [이 보도에 따르면] 더 심각한 처지에 놓인 이들도 있는데, 맙소사!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군요!

그들 입장에서는 더 불가능한 일을 겪는 셈인데, 어쩌면 ‘당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빛을 보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더한 사건이 벌어진 격입니다.

[에게] 빛이 솟아올랐도다.

뭐라굽쇼? 빛이 솟아올랐다고요?

거리의 차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빛을 보았다면, 보는 만큼의 거리가 있는 겁니다.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솟아올랐다면, 볼 수 없게 그들 한가운데서 튀어나왔다는 겁니다, 빛이. 그러니까 빛은 어둠, 더 짙은 어둠과 더 가깝습니다, 아예 하나-였다고, 그런데 달-라졌다, 둘-이-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빛을 중심에서, 문명[文-明] 즉, 우리가 빚고 피워낸 것[文]이 가장 밝게 비치는[明] 가운데서가 아니라

변방에서, 외부나 다름 없는 데서 먼저 목격하고, 그렇게 된 데에는

저 빛이란 놈이 변방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 취급하는 바깥에서, 외부에서 튀어나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외부가,

예수라는 ‘사람의 아들’ 자신입니다.

이 사람의 아들은

죽음의 그늘진 데서 더 이상 앉아 있지 않고 ‘일어선’ 자요, 곧 돌출된 자입니다.

그가 돌출됨으로써 그는 이제 단지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감히 — 그러나 당연히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매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정작 자신을 고집스럽게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처합니다.

왜?


빛이 가장 짙은 어둠에서 태어난다면,

예수를 보았다, 그리스도를 보았다, 빛을 보았다, 말하는 동안

우리는 아직 뉘우칠 수,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는 내부에서 외부를 <보는> 입장에 섰기에

우리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을 모르고,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이를,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로 인지하고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인 줄도 안다면,

역시 ‘사람’인, ‘사람의 아들’이니까 ‘사람’인 ‘나-우리’도

자연히, 이미 벌써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니까.

예수는 하느님을 부를 때엔 “아빠”라고 부르고

자기를 가리킬 땐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우리를 가까이 두고,

우리가 다가가서

마침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리로 이끄는 겁니다.

마치 어느날 호쾌하게 서로의 장벽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것입니다.

“아우, 섭섭하게 왜 그래, 형이라고 불러. 저 양반이 우리 아빠잖아. 너랑 나랑 형제잖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가 다가온 줄 모릅니다.

모든 심판의 날을 미루고

모든 결정이 더 미루어질 거라고 믿습니다 — 믿지 않아도 믿으려 용을 씁니다.

있는 힘껏 해야 하는 일, 해야 하는 생각은 뒤로 미루고

하지 말아야 하거나, 적어도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앞세우고, 앞당겨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망(亡)했습니다.

똥망, 폭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을 읽고 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사망(死亡)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돌이켜, 마음을 돌이켜, 행동을 돌이켜, 삶을 다르게 살 것입니까?


기후 격변의 시대, 지정학적 각자도생의 시대,

성장의 저주, 발전의 함정, 경제체제의 한계, 정치의 종말, 혐오의 대폭발 시대에

여전히

사람의 아들로서, 사람이길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실은 ‘미루고’ 있지 않습니까?


즐거운 일은 나중에 하십시오.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다하고도 시간이 남고, 기력이 남으면 그때 다른 일을 하십시오.


똑같이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발신하고, 똑같이 하늘나라가 다가온다는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예수가 요한에게 합세하지 않고

요한이 잡혀가 신호 발신이 끊기고서야 자리 바꿔 같은 메시지를 발신한 까닭은

요한은 예수가 이미 왔다고 말한 거라면

예수는 내가 그 하늘나라라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은 동시가 아니라 연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요한복음 1장 5절.


그분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겨레는 맞아들이지 않았다.

— 요한복음 1장 10-11절.



뭐, 누구든 저 살고 싶은 데로 사는 겁니다.

제멋대로 사는 거죠.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무어라고 이래라 저래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언자는, 그리스도는 뭐라고 하네요.


그리고 곁에서 같은 목소리를 듣고, 같은 말을 드는 저는 궁금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 그래서, 이게 네가 바라는 거야? 정말 계속 이렇게 살고 싶어?



다른 길이 맞는 길인지 모르더라도

이 길이 틀린 게 분명하다면

우리는 이 길에서 벗어나는 건 미루지 않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늘나라가 다가왔대요.

대림절(待臨, Adventus)입니다.

그대는 무엇을 기다립니까?

마음 깊이, 몸 속 세포 하나하나가 무엇을 달라 울부짖습니까?


목소리를 듣고,

들어 주어도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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