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마태오복음 2장 18절)
✶그 때에 헤로데는 점성가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분노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 점성가들에게 정확히 알아보았던 때를 대중삼아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또래와 그 아래 아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리니 울음과 통곡이 애절하구나. 제 자식들 때문에 우는 라헬 위로받는 것도 마다하니 그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중략]
✶요셉은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가 자기 아버지 헤로데에 이어 유대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갔다.
✶나자렛이라 하는 마을로 가서 살았으니 예언자들을 시켜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리리라" 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오복음서 2장 16-17절. 21-23절.
그리스도교는 스테파노 부제를 최초의 순교자로서 기념합니다. 그는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사도들의 일을 돕기 위해 임명된 일곱 부제 중 한 명으로 신앙을 지키며 죽임을 당했고, 이것은 그가 품은 신앙의 증거일 뿐 아니라, 그가 지상이 아니라 천상에 속했다는 증거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스테파노의 죽음은 마냥 비극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가 명백한 희망을 품고 그 일을 당했기에 그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고 그 사건의 행위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비록 그가 죽음을 지향한 건 아니지만 죽음의 사건이 그에게는 생명의 사건으로서 구현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그가 결코 운명의 굴레에 목이 매여 끌려가는 꼴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기념하는 또 다른 최초의 순교에는 <무죄한 아기들의 희생>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헤로데라는 왕의 잔혹함과 권력의 비정을 엿보는 것은 쉬운 일이나 이들의 죽음과 지금 온 세상이 큰소리로 떠들며 화려하게 축하하는 예수 탄생을 연결지어 바라보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둘은 연속한 사건이고, 연장한 하나의 신비가 분명합니다. 교회는 오래도록 이 어린 아기들의 희생을 묵상하였고, 어쩌면 답을 얻었고, 어쩌면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건 답을 구했다는 사실이며, 그 죽음을 아무 뜻없는 ‘개죽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죽음은 최초의 순교로 여겨졌지만, 동시에 세례받지 않은 그 아기들은 순교할 신앙도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표준해석은 이렇습니다. — 그 아기들은 죄가 없지만 구원의 세례 또한 받지 않았기에, 그들은 모세나 엘리야처럼 위대하지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림보’에 머물렀고, 마침내 그리스도가 골고타 위에서 죽고, 묻힌 뒤, 부활할 때에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영생을 얻었다. 이것으로 문제는 풀린 걸까요?
애초의 사건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튼 예수 탄생이 빌미가 되어 이 비참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 물론 이는 헤로데 왕의 책임을 면하거나 감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뭐가 되었든 행위자는 헤로데이고, 예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자, 이 죽음에서 빠져나간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살인미수 사건의 생존자인 것이며, 넓은 의미에서 희생자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생존자가 누린 영광, 그 생존자에게 바쳐진 영예를 생각할 때, 이 아기들의 죽음은 너무 거대한 피투성이 트로피 같다는 불편함이 남게 됩니다.
그리스도교회는 결국 이 아기들의 죽음을 단순히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순교’라고 규정하고, 전례력상 예수 성탄 가까이 배치합니다.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신일이고, 26일은 최초의 명시적 순교자 스테파노의 축일, 27일은 예수의 사랑받은 제자로서 복음사가인 사도 요한의 축일로 두어 복음을 행실로서 증거하고, 복음을 기사로서 전파, 증거한 업적들을 기리고, 28일에 곧바로 무죄한 아기들의 순교 축일을 두어 이들의 죽음이 비록 이해할 수 없지만, 헛되지 않다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다고 고백하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가 특별하게 기념합니다.
이를 수사(修辭)하고 정당화하는 신학의 언어들이 있습니다. 그 배경에 든든하게 자리한 탄탄한 구조 또한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그러한 설명은 어떻게도 “제 자식들 때문에 우는 라헬”이 “위로받는 것도 마다하”는 것을 무마할 수 없습니다. 80년 오월 광주의 어머니들의 울음이, 2014년 4월 세월호 어머니들의 울음이 유독 서늘하고 뜨거운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쩌면 베들레헴과 그 일대 — 예수일 수도 있을 싹을 모두 자르기 위해 설정된 두 살 또래와 그 아래 —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사건은 ‘사랑의 종교’라는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기 위한 어떤 설정도 섭리도 아니고, 우리 인류가 유구한 역사에 걸쳐 지치지도 않고 질리도록 반복하는 ‘사회적 참사’의 일종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교의 시초에 이 사건이 껴든 것은 그리스도교의 자기 정당화나 전설적 치장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수와 예수공동체 그리고 그 제자들의 공동체와 후계한 신자들의 공동체 — 곧 교회가 처음으로 이 사회적 참사에 눈길을 두고,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처음으로 이 비극에 대한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보다 이 비극에 대해 공감하고 통감하는 일을 우선한 공동체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종교(宗敎)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렐리지온(religion)은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유력합니다. 하나는 re + ligare 이니, 다시-묶다,입니다. 재결합. 즉, 본래 하나이던 것이 둘로 쪼개졌으니 이를 다시 하나로 합치는 행위, 마음, 실천 들이 종교라 이 말입니다. 인간과 신 사이에도 해당하지만, 인간과 인간, 개인과 공동체의 결합을 가리킨다고도 여겨져왔습니다. 다른 해석은 re + legere 즉, 다시-읽다,입니다. 신성한 것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숙고, 경청을 뜻한다고 풀이해왔습니다.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Cicero)가 지지한 해석으로, 신성한 것에 대한 세심한 관찰, 의례적 정확성, 경외의 태도를, 신을 향한 감정보다, 실천과 태도의 엄격함을 강조한 것으로 로마 시대 제의 중심적 종교관을 잘 보여줍니다. 부처 이전의 브라만교도 비슷하게 제의를 중심에 두었습니다. 사실 초대 종교는 의례의 말마디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 제의에 사용하는 물건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오직 이렇게나 저렇게 정해진 대로 정확하게 수행하고 지키는 게 중요했습니다. 유태교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도 아마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엄격한 태도가 확 깨트려진 것이 ‘타자에 대한 연민’이요, 특히나 내 탓은 아니고 딱히 누구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분명 커다란 슬픔과 설명불가능한 비참함에 대한 수용, ‘비참함을 끌어안음’에 있다고 할 수는 없을까요?
저는 그리스도교가 그사이 나타나고 사라진 무수한 종교들 사이에서 유난한 생명력과 설득력을 가지고 퍼지고 심겨진 데에, 특히나 폭력적 압제자의 선전과 동화(同化) 도구였다는 오명을 들쓰고도 면면히 이어지고 사람들의 심령을 흔들어 뿌리 내린 데에는 이 출발의 유전자(gene 말고 meme)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관심, 무조건적 수용. 의미를 빼앗기고 박탈당한 것들을 복권시키고 끌어안는 이 종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로 책임졌다고, 그 태도가 이어져 죄인으로 여겨지거나 사회가 배출하는 오물 취급을 받던 이들을 ‘사랑할 대상’으로서, 마침내는 ‘사랑 안에서 일치하는’ ‘확장된 자기’요, ‘자기 실현’의 모습으로서, 올바르고 의롭고 거룩한 의무에까지 끌어올린 데 있지 않은가 하고.
매슬로우는 인간 욕구의 발달단계를 설명하며 식욕과 같은 기초 욕구, 자기보존의 욕구로부터 마침내 최종적으로 ‘자아 실현의 욕구’라는 가장 높은 욕구에 이른다고 설명하였으나 이 이론의 다른 각 부분과 다르게 ‘자아 실현의 욕구’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나 싯달타 부처를 언급할 뿐이지요.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건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냐. 실은 인류가 이제껏 그 사이 놓인 생물학적 욕구나 사회적 욕구는 다 경험했고, 완벽하게는 아니라도 모형적으로 실현하여 예시할 수 있지만, ‘자아 실현’은 사실 그게 무언지, 그런 게 있기는 있는 건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자아 실현은 정의나 평화처럼 전적으로 ‘인간적’인 가치로서, 당연한 것이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롭게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중인 것입니다. 마치 ‘인권’처럼 당연하고 천부적이라면서 정작 어디서도 온전하게 실현되지 않고 있는, 뭐랄까, ‘인류의 추구미’인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는, 성서는 하나의 추구미를 더한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연민’을, 사회적 참사에 대한 관심과 전면 수용을 통해, 자아 바깥의 타자를 면밀하게 re-legere 하고, 기어코 re-ligare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빈 틈, 자아 바깥을 없애고, 모두 자아 안에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자아 실현입니다. 어떤 개인도 타자를 포함하고, 타자를 위하기까지 하는, 그런데 그것을 오로지 자기 자신의 순수한 기쁨으로서 하는 데 이르지 않고는 ‘자아-를-실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현될 자아란 그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 아닌 자아란 어떻게도 지정할 수 없고, 굳이 지정하고 규명한다면 이미 여기 내던져진 어찌됐건 ‘너는 아닌’ 자, ‘남이 아니라 그냥 나인’ 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왜 따로 실현해야 하죠?
실현하고 싶은 욕구가 남은, 추구미는 이겁니다.
우리는 다 남이 아니다. 나는 너가 아니라 나이지만, 아니야, 나는 기꺼이 너가 될 거고, 너는 이미 나인 거야. — 그리하여 너의 슬픔은 나의 슬픔. 나는 너를 위로할 수 없지만, 너와 같이 아파하고, 이 모순을 견디리라. ……해 보니까 이천 년을 넘겨도 풀 수 없는 불가해하고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렇게 끌어안으며 구한 생명이 여럿이고, 다시 묶인, 연결을 회복한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나는 지금도 저 아기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남들이 한 그 잘난 설명들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도 같이 말합니다. 그것을 이웃에 대한 사랑, 타자에 대한 헌신인 줄 안 것은 착각이었다는 것도 겸허히 고백합니다. 나는 이미 이것들이 전부 내게 가장 좋은 일임을 압니다. 무죄한 아기들을 순교자로 끌어안는 것은 그리스도교회라는 자아의 실현이며, 마찬가지로 삶의 덧없음과 고단함 앞에서 어둠 속에 훅 뛰어든 신비로운 다이버(diver)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한에서 누구라도 자기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의 다른 말로 하자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며, 딱 두 개의 계명만 있다며 제시한 이른바 대계명(大誡命, The Great Commandments) —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 다름아닙니다(마태오복음 22장 37.39절; 마르코복음 12장 30-31절; 루카복음 10장 27절 참조).
나는 당신도, 두려움을 품고 달아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두려워 돌아와도 살짝 비켜서서 돌아왔지만, 결국 끝내 모든 걸 받아안을 당신도 '나자렛 사람'이라고 부를 날을 기다립니다.
나자렛 사람이라 불리세요. 자아를 실현하세요. 가장 높은 것을 바라세요.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