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포터로빈슨의 내한공연이 있었죠. 수차례 포터의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저로써도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기도 하고 마침 새로운 앨범도 릴리즈 되었기에 색다른 버전의 포터를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다녀왔습니다. 제가 꾸준히 포터의 음악을 좋아하고 청취하는 주된 까닭은 주류에 편승하기보다 자신만의 색깔을 우직하게 음악에 투영해 온 뚝심 있는 아티스트임과 동시에 저 자신도 EDM씬이 한창 기이한 열기로 휩싸이던 시절, 흐드러지게 나오던 비슷한 종류의 음악들에 질려버린 상태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이미 엑스엑스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대화를 해본 적은 없어도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아티스트라 그런지 더더욱 이번 내한공연이 반가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올해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손꼽아도 무방한 포터의 SMILE! :D
서울 공연에 대한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Worlds, Nurture, 그리고 SMILE! :D
위와 같이 구분하여 진행!
이번 SMILE! :D 투어의 가장 큰 특징은 통상적인 신보 투어와는 다르게 자신의 음악활동시기를 크게 3막으로 나누어 진행하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보 투어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음악인생을 2시간으로 압축한, 굉장히 밀도 높은 구성의 콘서트였습니다. (그런 공연이 단돈 99000원!)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식을 취하는 경우, 초창기 곡부터 시간 순으로 배치하는 편이 많은데, 오히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신보부터 역순으로 진행하여 루즈하게 전개될 수 있던 중후반부가 탄력을 받아 초반 20~30분만 재미있는 공연이 아닌,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 몰입하게 되고 임팩트를 느낄 수 있는 흐름이 좋았습니다.
또한 아시아투어를 진행하면서 무대 세트가 조금 축소되고 그에 따라 연출도 미묘하게 바뀐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세션멤버들이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들이 화면에 잡히지 않는 대신 사전에 준비된 영상들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구성으로 변화되어 저는 오히려 좋았습니다. 기존의 연출방식이었다면 밴드스러움이 더 어필되었을 테지만 결국 포터의 음악을 음원으로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닌, 공연장까지 찾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에는 영상미가 크게 한 몫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전 곡들의 영상도 100% 재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달라진 것들이 있어 그런 부분들을 확인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걱정했던 밴드 셋, 그러나!
사실 저는 공연 전에 밴드 셋으로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 기뻐함과 동시에 조금의 우려도 가지고 있었는데 포터의 공연을 여러 번 봤던 경험에 의하면 포터는 뛰어난 프로듀서임에는 틀림없으나 탁월한 가수라고 느껴본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컬 컨디션에 따라서 몰입도가 조금 깨질 수도 있겠다 나름의 각오를 했습니다만 이펙터와 세션멤버의 서브보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굉장히 영리하게 약점을 커버한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본인의 보컬 비중을 너무 낮추면 관객들이 굳이 밴드 셋으로 진행하는 이유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고, 반대로 지나치게 많이 부른다면 그만큼 보컬에 대한 약점이 드러났을 수도 있는데 밸런스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 서브보컬을 맡은 세션멤버의 공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심지어 Divinity나 Language와 같은 곡에서는 개인적으로 이전의 라이브 버전보다 더 감흥에 젖을 수 있었기에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습니다. 조금은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지만, 서브보컬 비중이 높았던 곡들은 모두 좋았던 것 같네요. 물론 포터도 최상의 컨디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발해 줬습니다.
(그래도 서브보컬이 더 좋은 걸 어떡해)
Cheerleader는 띵곡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SMILE! :D 앨범은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몇몇 인상적인 트랙들이 있었지만, 나머지 수록곡들이 너무 무난하게 다가왔달까요. 저는 새로운 앨범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다기보다는 오히려 과감한 변화를 원했었는데 그걸 충족시켜 준 트랙은 Cheerleader 정도에 그친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다만 이번 내한 공연에서 신보의 곡들을 들으니 이런 밴드 셋 라이브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 같았고 음원으로 들었을 때 보다 조금 더 힘을 발휘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Cheerleader는 처음에 공개되었을 때도 포터가 만든 곡들 중에 가장 라이브에 특화되지 않나란 생각을 했는데 현장에서의 열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2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멋진 공연을 계속 이어나갔는데 종료된 시점에서는 Cheerleader의 폭발력만 떠오를 정도였으니 말이죠. SMILE! :D 앨범이 저에게 있어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정말 멋진 뱅어를 남겼다는 인상은 진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
올해 최고의 가성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물가처럼 공연 티켓의 가격도 이전에 비해 만만치 않아 졌는데,
다른 공연에 비해 다소 저렴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99000원의 가격으로 이 정도의 볼륨과 수준 높은 연출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에 가까웠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제이미 엑스엑스 내한 공연도 관람했고 그 공연도 물론 내용적인 면에서 정말 좋았지만 어딘지 모를 찝찝함이 조금은 남아있었는데 포터로빈슨의 공연이 전부 해소해 준 기분입니다. 가히 올해 최고의 가성비 공연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으며 이 정도의 만족감을 받은 공연은 당장 떠오르는 걸로는 잭화이트 단공 정도가 생각나네요. 아티스트 본인도 무척 즐거워한 모습이라 재내한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해외 뮤지션들처럼 물 떠놓고 기도해야 하는 수준으로 기다리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이번에 못 보신 분들에게도 다음 기회가 꼭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