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IMF라는 거대한 파도가 우리나라를 덮친 1997년, 우리는 불안한 미래 속에서 작은 희망을 찾아 여행길에 올랐다. 형식은 여행이었지만, 사실상 이민을 고려하며 떠난 망망대해와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IMF 시대부터 은퇴 후 일본 여행까지, 여행이 나에게 선물한 소중한 시간들을 '함께 걷는 삶'이라는 주제로 돌아본다.
여행이란, 함께 걷는 삶이다.
30~40대에는 여행을 자주 하지 못했다. 1997년 갑자기 찾아온 IMF 외환금융위기가 우리나라를 덮쳤다. 대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금융기관들은 살아남기 위한 작업으로 직원들의 대량 감축과 자가 건물을 팔기 시작했다. 부부가 같은 직장에 다닐 경우, 한 명은 퇴사 권유를 받았다. 남편과 나는 서로 다른 은행이라 달랐지만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와 위기감이 몰려왔다. 인위적인 통합 작업으로 같은 지역의 지점들이 통폐합되었고 규정과 전산업무를 하나로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노력과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IMF 영향으로 직장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올 때, 10일간 미국 여행을 떠났다. 처음으로 장기 휴가를 냈다. 형식은 여행이었지만, 고용의 불안을 느낀 남편이 이민을 고려해 보라는 누나의 권유에 흔들렸었나 보다. 열흘간의 미국 여행은 나에게 쉼을 주는 시간이었다. 독립기념일을 맞아 동네에서 열린 자동차 카퍼레이드는 그야말로 축제였다. 고모(아들의 고모)네는 한국인이 없는 조용한 동네에 거주했다. 어느 날 홀로 아들과 집에 있는데 청소차가 지나갔다. 청소차에 올라타 휘파람을 불며 신나게 일하는 청소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암울한 모습 때문이었는지 신바람 나게 일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압박감 속에서 우리는 본부 부서의 중요 직책을 맡아 열심히 일했다. 새벽 출근에 야근은 일상이었고 휴가일정조차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휴가는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시간이 되었고, 휴일에는 집 앞 호수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8년간 프로젝트팀에서 일했던 나는 직원 연수와 면접관으로 활동하면서 지방 출장이 잦아 집을 비우는 일도 많았다. 업무적으로 인정받으며 다양한 역할과 커리어를 쌓아 갔지만, 개인적인 삶에는 공백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엇갈린 시간 속에 가족 여행을 못 가는 대신 회사에서 보내준 해외여행의 혜택을 여러 번 누렸다. 일본을 비롯해서 하와이와 동유럽, 호주까지 다녀왔다. 일본은 주로 지점과 기업체를 돌아보는 것이었지만, 하와이는 아들과 함께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유럽은 선진문화체험으로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에게 문화체험이라는 명목하에 맥주 마시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2003년 프로젝트 진행과정에서 해외 우수사례 벤치마킹을 위해 호주에 갔다. 업무도 하고 때론 여행을 즐기면서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고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남편과 함께한 서유럽 여행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남편의 서강대 MBA 연수과정으로 다녀온 서유럽 여행은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아들이 <먼 나라 이웃나라>와 <로마인 이야기> 책을 읽고 유럽 역사에 관심이 많을 때였다. 남편은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방문지인 이태리와 프랑스에 관련된 여행책자를 사서 아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했다. 덕분에 아들은 여행하는 내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쏟아내느라 신이 났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책에서 본 것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즐거웠던 모양이다.
은퇴를 앞두고 2017년부터 매년 일본 여행을 한다. 결혼기념일 주간에 맞춰 둘만의 오붓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을 마친 후, 남편은 은퇴하면 일본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6개월의 단기 유학을 계획했다. 30년 넘게 수고한 남편에게 일본 유학은 퇴직 선물이었다. 아직 현직에 있던 나는 그를 홀로 보냈다. 6개월은 2년이 되었고, 공부를 마친 남편이 돌아올 때쯤 코로나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2023년에는 남편이 살았던 맨션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호텔이 아니어서 여행이라기보다 현지인처럼 도쿄를 돌아다녔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빨래를 돌리고 집을 나선다. 지도를 펼쳐놓고 가고 싶은 곳을 정해 도쿄 시내와 근거리의 유적지를 방문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빵집과 마트에 들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지난 3월에는 오사카와 교토를 10일 동안 여행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돌아보는 것을 좋아한다. 일본 정원, 사찰 등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천천히 걷고 또 걷는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걷다 보면 보인다. 특별한 것이 아닐지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시간이 좋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것도 좋겠지만,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도 부담되고 일본이라는 한 나라를 좀 더 깊이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일본의 도시들을 매년 여행한다.
남편과 일본 여행을 하면서 '함께 걷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조금은 천천히 걸으려고 한다. 아파서 끙끙 앓으면서도 일에 매달렸던 시간들, 내가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보내야 했던 시간들을 이제는 조금씩 쉼을 얻으며 보내고 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나를 돌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따로 또 함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때로는 함께, 그러나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은 서로에게 구속되지 않으면서 존중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여행은 우리에게 '함께'할 수 있는 삶의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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