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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유에서 유

표현된 것과 의도한 것 사이의 낙차

by 녹턴

별점: ★★★☆

추천대상: 가벼운 시집을 찾고 있는 분/ 글자놀이(언어유희)를 좋아하는 분

말하는 방식이 재미있어서 꺼내본 시집인데, 언어유희를 통해 내용을 뒤트는 방식이 참 좋았다. 시 3개 정도 뽑아서 후기를 간단하게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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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는 어떤 무명의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인데, 이를 짐승으로 바꿔 말한다. 아무리가 아무렴으로 수렴한다는 말도 좋았다. 점점 무명의 누군가에 대해 서슴없이 말하는 걸 합리화한다는게 아닐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무렴 어때) 타인의 정보에 관해 무감각해진 사회에서, 나 또한 그렇게 될까봐 자기를 숨겨버렸다는 대목이 공감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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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이걸 해설한 것도 좀 충격이었다.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 또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엔 학생이었지만 뚝뚝 끊어지는 ‘샤프심’, 똥을 끌고 다니는 ‘지우개’, 갈가리 찢어진 ‘노트’라는 사물로 비유된다. 학생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위대한 준비물로써 사회에 투입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반면 준비하기를 그만둔, 원생이기를 포기한 학생들은 목적어에서 주어가 되고, 보어가 없어도 완전해진다. 그들은 비로소 대명사가 된다.

해설: 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고스란히” 이동했다. “준비물처럼”이라고 썼지만, 실제로도 재수생은 사회에 소용되기 위한 준비물이다.

라고 적힌 부분이 좀.. 뭐랄까. 안습이었다. 비유가 좀 더 순화된 표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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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점점 짧아진다. 힘겹게 오지만 기척 없이 사라지고 만다. 좋은 기억보단 안 좋은 기억의 상해가 크기 때문에, 봄의 부재를 크게 느낀다. 그러곤 장면이 바뀐다. 두 명이 고기를 먹고 있다. 둘은 핏물이 줄줄 흐르는 고기를 썰고 있고,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육식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다. 그들은 인간답게 인간으로 물든다.

지구온난화의 큰 원인은 산림의 파괴인데, 산림을 파괴하는 이유 중 대부분을 목축업이 차지한다. 소를 키워서 고기를 먹으려고 저러는 것이고..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어서이다. 불법으로 태운 열대우림에서 키우는게 돈이 훨씬 덜 든다.

이러한 연관성 때문에 봄이 짧아지는 내용과 육식(칼로 고기를 썰다 핏물이 나와버렸다, 나도 모르게 잔인해졌다)에 대한 내용이 연달아 나온게 아닐까?


아래는 해설에서 인상깊었던 부분.


모든 언어에는 반드시 ‘전달하려는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전달된 것’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어떤 전달의 매개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수한 관념을 우리는 이데아라 부른다. 일상적인 소통의 모델이 어떤 표현도 요구하지 않는 순수 관념, 곧 표현 불가능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실언이나 식언을 밥 먹듯 하는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이 증거하듯이, 전달하려는 것과 전달된 것의 차이야말로 모든 오해와 뉘앙스를 낳는 근원이다. 그런데 시 역시 이 둘의 차이에 기반을 둔다. 표현된 것과 의도한 것 사이의 낙차에서 에너지를 받아서 시는 제 크기를 키운다. 시에서 ‘전달된 것=표면’이란 단순히 ‘의도한 것=이면’의 드러남이 아니다. 시는 이면에서 한 번(이것은 시가 웅변술, 논설문, 법전, 신문 기사와 공유하는 것이다.), 표면에서 또 한 번, 두 번 말한다.
-해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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