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블록체인을 지워야 하는가?
우선 블록체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디자인 이야기를 짧게 해볼까 한다.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UX)이라는 표현은 사실 세상에 나온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UX의 아버지라 불리는 돈 노먼(Don Norman)이 1988년에 출판한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에서 처음 UX가 언급되었다. UX 디자인 이전에 자주 사용되던 비슷한 용어로 사용자 중심(User-centered) 디자인이 있었다.
그렇다면 사용자 중심 디자인과 사용자 경험 디자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용자 중심이 시스템 그 자체와 인터페이스의 미학에 초점을 맞췄다면, 사용자 경험은 사용자가 원하는 것, 곧 니즈(Needs)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UX 디자인의 교과서라고도 불리는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에서 돈 노먼은 좋은 UX 디자인의 6가지 원칙을 언급했으며, 간단히 살펴볼 시 다음과 같다.
가시성(Visibility): 기능이 사용자에게 직관적이어야 한다. 재생, 일시정지, 빨리 감기, 앞으로 등의 단어는 각국의 언어마다 다르지만, 위 아이콘은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가 이해할만큼 직관적이다.
반응(Feedback): 사용자의 행동 후 어떠한 작동이 이뤄졌는지, 또는 어떠한 반응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한 정보를 사용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맞게 입력하면, 띠리링~ 등의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린다. 하지만 비밀번호를 틀리게 입력하면, 흔히 오류라 생각할 수 있는 소리가 들린다.
행동유도(Affordance): 사용자에게 사물을 어떻게 다루면 될 것인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컵의 손잡이는 누가 보더라도 손을 넣어 컵을 잡으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맵핑(Mapping): 행동에 의한 작동들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관계성이 뚜렷해야 한다. 예시를 들자면, 자동차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자동차가 오른쪽을 향하도록 바퀴의 방향을 튼다. 만약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는데 자동차가 왼쪽으로 향하도록 작동한다면 매우 불편한 UX를 경험할 것이다.
제한요소(Constraint): 사용자의 오류 및 오작동을 사전에 방지한다. 예를 들어 가위에 있는 두 구멍의 크기는 손가락이 들어갈 수 있는 개수에 한계를 둔다.
일관성(Consistency): 디자인이 일정한 패턴 혹은 규칙을 가지고 있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애플의 상품군은 모두 비슷한 UX를 제공하여, 처음 사용하더라도 큰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집에서 출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앱이 무엇일까? 바로 이번에 스타트업 업계에서 큰 이슈가 된 우아한형제들의 ‘배달의민족’(이하 배민)일 것이다. 배민 앱을 사용하면 참 별거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단적으로 보자면 배달받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고 받는 것이 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 대표가 디자이너 출신인데 배민 앱을 개발하며 UX 디자인에 대한 고민이 과연 없었을까?
평소에 우리가 음식점을 가서 밥을 먹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일단 한식, 중식, 일식 등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을지 고민한다.
만약 피자가 당겨서 피자로 정한 다음엔 어떤 피자집을 갈지 고민한다.
정한 피자집에 와서는 어떤 종류의 피자를 먹을지 정한다.
피자의 토핑에 무엇을 추가할지 정한다.
종업원이 주문한 메뉴를 확인 시켜 준 후 선불/후불로 결제하고 피자를 먹는다.
우리는 이러한 고민과 결정을 살면서 수 없이 해왔다. 그렇다면 배민이 생각한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위에 배민 주문 과정을 보면 어딘가 많이 본 듯하다. 바로 우리가 평소에 오프라인에서 거치던 과정을 그대로 앱 속으로 넣어 놓은 것이다. 처음 종류 선택에서부터 결제까지 적으면 10번도 안 되는 터치만으로 음식을 주문하여 문 앞에서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UX 디자인은 편리함을 주는 여부를 넘어 사람의 행동과 심리를 고려해야 하는 분야로 거듭나고 있다.
이해와 암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새로운 정보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생각 그리고 본능에 가까울 시 우리는 이해를 한다. 그러나 그 정보가 익숙하지 않다면 우리는 암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서비스가 있을 때 평소에 사용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가? 아니면 설명서를 읽어가며 습득하는 것을 선호하는가? 특별한 경우가 아닌 경우 전자를 선호한다. 좋은 UX일수록 우리로 하여금 암기가 아닌 이해를 하도록 한다.
하지만 블록체인이라는 특성상 완전한 이해를 제공하는 서비스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나, 최대한 쉬운 이해를 돕도록 해야 한다. 또한, 배민처럼 사용자의 경험을 그대로 온라인으로 구현시키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사용자도 새로운 기술 기반의 서비스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부는 필요하다. 이 공부의 절차를 최소화하고, 적응 기간을 줄이는 것은 결국 UX의 문제이다.
2018년 1분기를 기점으로 암호화폐의 시세가 급락하였고 업계는 그제서야 사용자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서비스를 블록체인 기반인지 모르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자체 토큰을 사용하는 것 이외엔 블록체인의 단서를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서비스들이 나오기 시작한 바 있다. 필자는 블록체인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 이전에 가능한 것인가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왜 억지로 블록체인을 숨겨야 하는가.
"기술 기반 지식이 없는 사용자가 서비스의 UI와 사용성을 보고 해당 서비스가 Dapp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웹 앱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면, 해당 사용자는 블록체인이 진정으로 전달해야 할 무신뢰성과 투명성을 보장받고 있지 못한 것이다."
– 벨트란(Beltran) Web3 Design Principles 저자 | Decentralized Design Lab 공동창립자
사람들이 블록체인 기반의 서비스인지 모르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큰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블록체인을 지워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차피 지울 수도 없다. 블록체인 기반인 것을 어느 시점에서 인지할 텐데 굳이 지워야 할 이유가 있는가? 없다. 블록체인의 장점들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면 될 문제이다. 블록체인의 무신뢰성과 투명성이라는 장점을 내세워 사기칠 수 없는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만들어 낸 EarnBet과 같은 도박 Dapp이 하나의 예시이다.
블록체인 기반 서비스가 블록체인을 완벽히 숨겨야 할 이유는 없다. 블록체인의 복잡함이 주는 이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비스는 암호화폐 지갑 서비스이다. 수많은 암호화폐 지갑 서비스가 존재하며 갈수록 더욱 발전된 UX/UI의 지갑이 나오고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지갑 가운데 하나인 메타마스크(MetaMask)를 예시로 살펴보자.
직관적으로도 매우 큰 UI 변화가 있었다. 사용자가 자주 원하는 정보를 시각적으로 더욱 강조하고, 사용자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정보는 축소시켰다. 예전 버전에서는 각 세션마다 경계가 불분명했지만, 현 버전에서는 계정, 보유 이더 개수, 히스토리의 경계를 가로줄로 나눔으로써 더욱 분명해졌으며, 날짜와 이더 주소와 같이 비교적 자주 체크하지 않는 정보는 대폭 축소한 뒤 자주 사용하는 입출금의 크기를 확대했다.
거래 내역에 대한 세부 정보를 보여주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전 버전에서는 세부 정보를 보기 위해서는 지갑에서 웹으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현재는 하나의 서비스 안에서 동일한 정보를 더욱 효과적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블록체인상에 기록된 정보는 둘 다 동일하지만, UX/UI에 따라 사용자에게 주는 편안함과 용이함은 천지 차이이다.
"만약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이 당신의 앱을 사용하기 위해 FAQ를 읽어야 한다면, 그 앱은 이미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맷 스토러스(Matt Storus) 21.co 디자인팀장
현재 많은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살펴볼 경우, 해당 서비스의 사용법을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기존에 사용하던 서비스를 더욱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앱을 사용하는 것인데 그 앱을 사용하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한다면 이미 편리하지 않은 것이다. 블록체인을 기반한다는 핑계로 서비스 사용법을 가르쳐 준다면 그 서비스는 이미 경쟁력에서 밀렸다고 볼 수 있다.
스팀잇이라는 서비스는 다들 알 것이다. 굳이 토큰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글을 작성할 능력만 있다면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스팀잇의 UX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어 오고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는 것을 보면 사실상 문제 개선을 할 의지가 없다 판단해도 될 것 같다. 정말 사소한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팀잇에서 보팅은 3초에 한 번만 가능하다. 3초에 한 번 이상 보팅할 경우 위와 같은 에러 메시지가 뜬다. 이게 블록체인이라 뜨는 것일까? 아니다. 그냥 에러 메시지의 디자인에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다른 서비스를 사용하며 에러 메시지가 위와 같이 소스 코드까지 친절히 보여주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사소한 것에조차 디자인에 대한 무관심이 보이는데 좋은 UX/UI를 제공하기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이다.
추가적으로, 현재 스팀잇 내 개인 지갑을 보기 위해서는 새로운 윈도우 창을 켜야 한다. 이전에는 하나의 창에서 모든 것이 가능했지만, 이는 더욱 퇴보한 경우이다.
"블록체인의 대중화 가능 여부는 디자인의 문제이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2018년 10월에 진행된 데브콘에서 나온 슬라이드 자료를 참고하면 대부분의 Dapp 사용성 문제 기반에 디자인 및 UX 관련 문제가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 디자이너가 차지하는 비율은 1%가량이었다. UX와 디자인이 디자이너만의 영역은 아니지만, 이는 수요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치이다.
디자이너가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우가 좋지 못해서이다. 현재 대부분의 블록체인 스타트업 팀 구성을 보면 크게 개발팀, 운영팀, 마케팅팀으로 나누어져 있다. 디자인팀이 따로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보통 외주를 맡기는 경우가 많으며,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수는 1~2명이다. 그 한 두 명이 웹과 앱의 UX/UI 디자인을 다 책임진다. 현재 업계에서 실제로 종사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안타깝다. 디자이너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다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중요성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했다는 것과 일치한다.
왜 실생활에 쓰이는 Dapp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류의 질문에 대한 업계의 답변은 아직까지도 비슷하다.
“기술이 아직 초기이니 그렇다. 기술이 발전될수록 좋은 UX/UI를 포함한 서비스가 많이 나올 것이다.”기술이 초기라 그렇다는 것이 과연 이유일까, 핑계일까? 기술적으로 아직 부족함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좋은 서비스를 못 만드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기술이 발전된다는 것만으로는 UX를 대폭 향상시킬 순 없다. 블록체인을 통해 암호화폐라는 인센티브를 준다는 이유로 사용자가 서비스를 사용할 리도 없다. 사용자가 서비스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 서비스가 돈을 벌게 해준다는 것이 아닌, 필요하고 유용하기 때문이다. UX는 기술과 디자인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사용자의 철학과 심리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사람들은 서비스를 선택할 시 그 기반 기술을 평가 항목에 두지 않는다. 성공적인 서비스는 고객과 서비스를 잇는 연결점을 중요시하고 고객이 원하는 결과물을 전달한다. 기반 기술이 블록체인이라 하여 서비스의 성공 여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서비스를 사용하는 대중 역시 달라지지 않는다. 기존 서비스보다 더욱 나은 UX를 사용자에게 전달한다면 블록체인 서비스의 대중화는 더욱 빨라질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되기를 희망해본다.
본 콘텐츠는 블록체인 인사이트 미디어 '노더'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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