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청 노무담 18

계약서 한 장의 무게

by 박감

이삿짐센터에서 일한 직원이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며 신고를 했다. 고용보험 기록상 근로자는 A 업체에서 20개월 일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신고 대상은 A 업체의 사업주 천 사장이었다. 먼저 사업주 천씨가 출석해 설명했다.


“그 근로자는 1년 되기 전에 B 업체로 옮겼어요. 다만 그때 B 업체가 고용보험 가입이 안 돼서 제가 대신 가입만 유지해준 거예요. 근로계약서도 A 업체 10개월, B 업체 10개월 각각 따로 써놨습니다.”


천 사장이 내민 계약서에는 A와 B 업체 각각 다른 사업주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B 업체 사업주 김 사장도 불러 근로자와 대질조사를 진행했다.

근로자의 말은 달랐다.


“김 사장님은 오늘 처음 봐요. 저는 천 사장님한테 고용된 거고요. 일은 이렇게 했습니다. 전날 반장이 문자를 보내면, 다음 날 아침에 반장 집 앞에 가서 같이 출발하는 거죠. 그게 20개월 내내 똑같았어요. 계약서에 사인한 건 맞는데, 제가 다른 회사로 옮긴다는 건 몰랐습니다.”


근로계약서에 서명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내용을 제대로 모르고 서명했다는 근로자의 주장. 여기서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건물 한 채도 계약서 한 장이면 사고팔 수 있듯이, 근로계약서 역시 한번 서명하면 그 효력을 되돌리기란 쉽지 않다. 피고용인의 처지에서 사업주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중요한 서류는 반드시 확인 후 서명해야 한다. 때로는 내용을 집에 가져가 검토하거나 전문가에게 상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김 사장에게 다시 물었다.


“천 사장님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저는 원래 천 사장님 밑에서 일했어요. 몇 년 일하다가 독립해서 제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천 사장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아무래도 천 사장과 김 사장의 관계가 수상했다. 단순히 ‘도와준다’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얽혀 있었다. 고용보험 전산상 B 업체의 사업주 연락처, 팩스 번호, 주소에 천 사장의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고, 김 사장의 자녀 성씨도 천 씨였다.


“혹시 부부 관계이신가요?”

“아뇨,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조회해 보니 두 사람은 10년 전 이혼했지만, 김 사장의 두 자녀의 아버지는 천 사장이었다. 법적으론 부부가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둘은 여전히 협력하고 있었으므로 가장(위장) 이혼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결국 퇴직한 반장을 찾아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천 사장이 두 업체를 다 운영했어요. 계약서에 사장 이름만 바꾼 거죠.”


근로자의 말이 사실로 밝혀졌다. A와 B 업체는 사실상 천 사장이 단독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이런 꼼수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시정지시를 내렸지만, 천 사장은 이를 거부했다. 다행히 대지급금 지급 요건을 충족해 근로복지공단에서 근로자에게 퇴직금을 지급했다.

결국 천 사장을 입건하여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였고, 법원에서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급한 퇴직금을 천 사장의 재산에서 압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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