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생 시절 디즈니월드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부터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드디어 첫 발을 내디뎠다.
사건의 발단(!)은 듀오링고라는 앱을 다운로드했던 것이었다. 아주 예전에 스페인어를 공부하려고 잠시 다운로드해 놨다가 써보지도 않고 금방 지워버린 앱인데, 저번달 어느 날 문득 생각나서 다시 다운로드했다. 두 개 정도 레슨을 들어보니 꽤나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학습을 시작하지 않으면 연속 학습 불꽃이 꺼지니 빨리 돌아와서 공부하라'는 알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기 때문에, 여전히 완벽함에 강박증을 가진 前 프로 완벽주의자인 나로서는 도저히 그 알람을 무시할 수 없어 반강제적으로 매일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벌써 32일째 매일 짧게는 5분씩, 길게는 15분씩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앱만으로는 문법적인 부분에 대한 학습이 아쉬워 최근에 책도 따로 구매했다. 역시 책을 보니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어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된다.
비록 지금은 아주 쉬운 단어와 문장만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불과 33일 전까지만 해도 아주 간단한 인사말 밖에 몰랐던 언어를 사용해 문장을 만들 수 있다니, 굉장히 신기한 일이다. 어릴 적에 영어를 처음 배웠을 때, 그리고 고등학생 때 프랑스어를 아주 잠깐 배웠을 때 이후로 거의 20년 만에 해보는 경험이 너무나 재미있다.
그리고 꼭 책을 사서 책상에 앉아 진지한 마음으로 임하지 않아도, 핸드폰을 사용해 게임처럼 매일 조금씩만 시간을 투자해도 하나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꽤나 마음에 든다. 나는 여전히 공부를 할 때는 책과 필기구가 필요한 아날로그 인간이지만 역시 뭔가에 쉽게 접근하는 데는 핸드폰만 한 게 없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는 것이다.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비록 기초적인 단어와 문장들이라 할지라도 한 언어를 알아듣고 말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의 폭이 한층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페인어를 배운 이후로는 스페인어 드라마에 꽤 많은 관심이 생겼고, 주위에 돌아다니는 외국인 중에 혹시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이 있진 않은지 궁금해 외국인들이 하는 대화에 예전보다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다른 언어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비록 이해하진 못하지만 이탈리아어도, 독일어도, 포르투갈어도 예전보다 더 생생하게 들린다.
디즈니월드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손님들과 동료들과 교류하고 지냈던 때가 생각난다. 영어 외에 다른 몇 가지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사람들, 나보다 영어를 배운 기간은 짧지만 말은 원어민처럼 하는 사람들을 보며 경외심을 느꼈고 나도 저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졸업을 하고 세상에 던져진 나에게는 다른 언어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할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라곤 없는 직장인의 삶을 10년간 살고, 맘의 여유는 있는데 체력은 없는 암환자의 삶을 1년간 살고, 항암과 수술로 바닥을 친 체력을 올리는데만 전념하는 암경험자의 삶을 2년간 살다보니 어느덧 13년이 지났다. 잊고 있던 다른 언어 학습에 대한 욕망은 작년에 『언어의 무게』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으며 다시 한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지중해에 접한 모든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레이랜드,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의 사건으로 인해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싶어 어느 날 훌쩍 포르투갈로 떠난 그레고리우스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새로운 언어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두 책과 듀오링고가 나를 드디어 새로운 언어로 이끌어주었다. 모든 인생의 경험은 그 크기와 무게에 상관없이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타인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 큰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스페인어를 배우는 지금, 나의 이 경험이 앞으로의 내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나갈지 굉장히 궁금해진다.
요즘은 매일 꿈꾼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청명한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어느 날 스페인의 한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식당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 모습을. 그러다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또다시 듀오링고를 켜고 스페인어 책을 펴게 된다.
그날을 위해 ¡ VAM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