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간 속으로 9화
"Ladies and gentlemen! We will be landing shortly at London Heathrow Airport. The local time is 11:20 AM. The weather in London is clear and the temperature is 77F or 24C."
기장의 안내멘트에, 준겸은 감았던 눈을 떴지만 사실 런던까지 오는 내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눌러온 서연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토해내듯 고백하고 뒤돌아섰어도 가슴이 후련해지기는커녕, 여러 생각이 뒤엉켜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이제 선후배로도 영영 못보면 어떡하지? 난 그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아니, 그래도 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내가 곁에 없는 동안 내 생각 조금은 하지 않을까? 오히려 못보는 동안 나란 사람 완전히 잊어버리려나?'
***
준겸이 서연을 처음 본 건, 고전음악감상반 동아리방에서였다. 학생회관의 다소 어두운 복도에서 조심스럽게 동아리방의 문을 열자, 창으로 쏟아져들어오는 햇빛이 너무도 환해서 마치 자욱한 담배연기처럼 순간적으로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스피커에서는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저 안쪽 소파에 한 여학생이 눈을 감고 앉아있는 옆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준겸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흰 피부에 동그란 이마, 긴 속눈썹... 그의 시선은 그녀의 옆얼굴을 타고 내려가 도톰한 핑크빛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가 길고 고운 목선에 이르러서야 겨우 옆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떻게 왔어요? 신입생인가요?"
여학생이 앉은 반대쪽에서, 자신을 향해 묻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준겸은 그제서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어 왔다는 말에, 입단 신청서를 내미는 그.
유난히 환한 미소가 인상적인 그는, 3학년 김선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경영학과 1학년 서준겸입니다."
그제서야 음악에서 깨어난 듯, 회의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서연. 누구냐는 눈짓에 선우가 재빨리 준겸을 소개한다.
"이 쪽은 새내기 서준겸. 저 친구는 나랑 동기, 불문과 최서연이야. 이제 우리 동아리 후배니까 말 놔도 되지?"
서연이 일어나 둘이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하늘색 롱원피스에 흰색카디건을 걸치고 있던 모습을 준겸은 아직도 기억한다. 서연이 가까이 오자, 생각보다 키가 크다고 느꼈다. 캠퍼스 내에 예쁜 여학생들은 많고도 많았지만 서연에게는 그들하곤 뭔가 다른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중독성 있는 달콤쌉싸름한 초콜렛처럼, 보기만 해도 달콤한 미소를 짓게 되는 그 이면엔 어떤 서글픔 같은 게 느껴졌는데 그게 대체 무엇인지, 준겸은 지금도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특별한 뭔가가 지금까지도 그를 미치게 만드는 건 분명했다.
준겸은 다른 남자후배들과는 달리, 단 한번도 서연에게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처음엔 무의식적으로 '선배'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고 나중에 남들은 '누나'라는 호칭을 쓴다는 걸 인지한 후에도 여전히 그러기가 싫었다. 자신이 서연보다 두 살 어리다고 해서 동생 취급, 애 취급 받기는 싫었다. 이렇게까지 반해본 여자는 처음이어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고백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두어 달이 흘렀는데 바로 그때쯤, 준겸은 서연과 선우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두 선배는 곧 모두가 인정하는 동아리의 공식 커플이 되었다.
'내가 먼저 고백할 걸......'
오랜 친구였던 둘에게는 훨씬 더 많은 추억과 교감이 있었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준겸은 자신이 놓친 타이밍이 아깝기만 했다. 두 사람이 사귄 지 100일쯤 될 무렵, 선우는 입대를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둘을 갈라놓을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노래도 잘하고 어딜 가나 분위기메이커였던 준겸은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도 서연 앞에서는 늘 긴장이 됐다. 서연이 늘 마음에 있으면서도, 때로는 체념하는 심정으로 자길 좋다고 하는 여자 몇몇과 사귀어보기도 했지만 매번 짧은 연애로 끝나곤 했다. 곁눈질하듯, 혹시나 서연과 선우가 헤어지지 않을까 서연의 주변에서 늘 그녀의 기색을 살피곤 했지만 슬프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동기 단톡방)
은채 : 이번 여름휴가 계획들 있니? 난 유럽 가고싶은데 휴가를 길게 쓸 수 있을 지 모르겠어. 준겸아, 너 지금 런던에 있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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