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이자 희망으로서의 삶, 영원한 감내로서의 예술

<햄넷>, 클로이 자오 (2025) 리뷰

by 김노엘

개인적으로는 모든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상실에서 비롯된 무질서 상태를 상정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맥베스>가 인정욕구와 권력욕으로 인한 비뚤어진 인간성의 상실을 제시한다면 <오셀로>는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감정적 상실을, <리어왕>은 정체성 상실을 다루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서도 가장 근원적인 상실을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삶의 원동력이 되는 질서 그 자체의 상실이죠. 아들 햄릿을 주역으로 하는 이 작품의 서사는 '왕'이자 '아버지'인 햄릿의 죽음을 원인으로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햄릿은 애당초 방황할 수밖에 없으며 세상에서 그 어떤 갈피도 잡지 못하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클로이 자오의 영화 <햄넷>은 셰익스피어가 그런 햄릿의 이야기를 만들게 된 이유로 아들 햄넷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드라마를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상실감과 삶의 관계, 그리고 삶과 예술의 관계를 관통하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영화는 셰익스피어가 <햄릿>이라는 개인과 사회 전반을 잇는 비극을 쓰게 된 동기로 아들의 죽음을 꼽습니다. 이는 가장 사적인 것에서 가장 공적인 서사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예술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햄넷>은 단순히 셰익스피어가 상실감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숭고함을 부각하려는 영화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주인공 격인 인물은 윌(셰익스피어)이라기보다는 아내 아녜스에 가깝습니다. 아녜스는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집필에 전념하는 남편에게 환멸감과 애증을 동시에 느낍니다. 이야기를 지극히 아녜스의 시선으로만 본다면 오히려 윌을 큰 일 한답시고 가정에는 소홀한 이중적 예술가의 상으로 읽을 수마저도 있을 정도죠.


그럼에도 <햄넷>은 끝내는 예술을 옹호하려는 영화입니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예술을 배제하고서, 진심으로 누군가를 연민하고 자신의 고통과 나약함을 감내해내는 '고양된 예술'을 옹호하고자 합니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내세우며 심지어는 일가족이 겪는 비극의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에서 오마주해오려고도 시도합니다. 하지만 클로이 자오는 이 레퍼런스와 오마주를 단순히 지식을 과시하려는 의도나 서사적 기교를 위한 장치로 이용하려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셰익스피어 작품들의 모티프는 윌의 삶과 예술이 얼마나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는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그렇기에 그 모든 모티프들은 결론적으로 윌과 아녜스의 근원적 교감을 다시 한 번 연결해주는 상징물이 됩니다. 고양된 예술은 단순히 예술가 스스로의 만족을 넘어 그것을 공유하는 모두의 감각을 합일시킬 수 있으리라는 클로이 자오의 믿음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영화 속 아녜스와 윌의 삶은 희망이자 저주가 공존하는 양면적 무대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만남으로 인해 모든 것을 얻었고 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희망과 저주는 딱 자신들이 삶이 지닌 부피만큼 유한할 것입니다. 유한성 자체가 희망이 되고, 또 동시에 저주가 될 것입니다. 저주가 곧 희망이고 희망이 곧 저주일 것입니다. 하지만 윌이 끝내 그 유한한 희망과 저주를 이야기로 기록해내고 한 편의 비극으로 완성해내는 순간, 아녜스가 애증을 넘어 환멸을 느끼던 자신의 남편이 써내려간 진심을 목도하는 순간, 그 희망과 저주는 영원히 감내해낼 수 있는 초월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처럼 고양된 예술은 윌과 아녜스의 일가족을 넘어 모두에게 무한과 영원의 감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즉 <햄넷>이라는 작품이 논하는 예술은 개인의 고통을 공동체의 것으로 확장시키는 공유의 감각입니다.


<햄넷>은 예술을 무기력하고 무용한 어떤 것으로 격하시키지도, 모든 것을 해결시켜줄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존재로 격상시키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지닌 초월성을 통해 우리의 유한한 삶을 감내할 수 있음을, 그 작은 위로의 가능성을 굳게 믿을 뿐입니다. 비극은 단순히 심연을 더하고 더하는 덧셈의 여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한한 희망과 저주를 무한한 초월의 세계에서 받아내는 곱셈의 여정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나약함을 감내해낼 좋은 무기가 됩니다. 다시 말해, 비극은 예술이라는 무한한 공간이 우리에게 선물한 작은 피난처입니다.


별점: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