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파반느>, 이종필 (2026) 리뷰

by 김노엘

넷플릭스 영화 <파반느>는 참 이상한 영화입니다. 인물들은 최신 스마트폰을 쓰고 숏폼을 보는데, 영화의 공간 감각은 자꾸 80년대 후반으로 미끄러집니다. 2020년대에 존재하는 공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80년대의 원작 그대로를 재현하고 있는 켄터키 호프(HOPE), 공중전화 박스와 달동네, 심지어는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지하철과는 이질감이 들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미정의 촌스러운 옷차림 등까지가 그래요. 영화 속의 서울은 꼭 80년대 후반과 20년대 후반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처럼 그려집니다. 이 낡고 새것 같은 시간의 혼합은 원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붙들고 있던 시대성을 지우는 대신, 사랑을 시대 밖의 문제로 만들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멜로 드라마이기에 앞서 민주화, 산업화, 현대화의 시대정신 아래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연대기입니다. 영화화 된 <파반느>가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뉘앙스를 보이는 것과 달리 이 소설은 80년대 중후반의 시점을 배경으로 함을 확실히 하고 있죠. 박민규가 굳이 이 시기를 이야기의 무대로 삼은 이유는 다양할 겁니다. 작가 본인이 이십대 초를 겪은 시기라는 점,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반대급부로 다양한 문제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시기라는 점, 나름의 노스탤지어를 자아내기 위해서라는 점 등 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죠. 개인적으로 이 많은 지점들 중에서도 제가 생각하는 소설의 주요한 특이점은 이 시기가 희망이 차올랐던 시기이자 동시에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점을 꼽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 시기의 시대정신은 민주화, 산업화, 현대화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세계가 점점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보았겠지만 박민규는 오히려 그 시절을 '가장 나았던 세계'로 이해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90년대와 00년대, 10년대를 지나오며 세계는 오히려 퇴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거죠.


그런 퇴보를 단적으로 은유하는 공간이 작중 주된 배경이 되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입니다. 80년대 후반은 대규모의 백화점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그곳은 말 그대로 박민규가 바라본 세계의 문제를 집약시켜 놓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 물질주의, 성과주의 등 90년대 이후 시작될 신자유주의적 흐름의 모든 맹아가 백화점에서 싹트고 있죠. 그 싹의 열매가 바로 지금의 세상입니다. 사회의 모든 소외는 한 공간으로 뭉쳤고 그 모든 얼키고 설킨 교차성의 문제들은 더는 풀어헤칠 수도 없을 지경이 됐습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바로 그 90년대를 눈앞에 두고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박민규는 소설의 결말에서 세계를 그 시간, 그 장소에 고정시키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냅니다. 그렇게 해야 그들의 연대가, 그들의 사랑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 시절으로 인해 소외된 이들이, 오히려 그 시절이기 때문에야 가능했던 연대와 사랑을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한 박민규의 발버둥이 서려 있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종필이 재해석해 영화화한 넷플릭스 영화 <파반느>는 그런 작가의 기획을 의도적으로 뒤틀고자 하는 의지를 보입니다. 이 영화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은 저이지만 적어도 이 야심찬 의지만큼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앞서 저는 영화의 배경이 지닌 20년대와 80년대가 공존하는 듯한 이질감을 말했는데, 실제로 이종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이질감이 의도된 바임을 밝혔습니다. 배경을 특정 시대에 국한시키지 않고 관객 각각이 자신의 이십대를 대입할 수 있는 시공간으로 보이도록 기획했다고 말했죠. 이런 기획 의도는 박민규의 원작이 드러내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저항하는 방식으로서의 사랑과 연대라는 주된 테마를 깡그리 부정하고자 하는 듯합니다. 박민규가 '그나마 그 시대였기에 그렇게라도 가능했던 사랑'을 그리워했던 반면 이종필은 '그 어느 시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념을 넘어선 사랑이 존재하리라는 희망'을 말하고자 한 겁니다. 어찌 보면 예술의 역할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박민규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순수한 스탠스를 취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는 내내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 떠올랐어요. 작품 자체가 내세우는 겨울의 이미지부터가 그랬고, 김춘수의 시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회적 맥락도 고려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수성에의 집착이 서려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순수성을 설득하는 과정이 지극히 나이브하게 다가왔다는 점은 크게 아쉬운 대목입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드러나는 세 사람의 연대와 경록과 미정의 사랑은 어찌 보면 초월적인 거라기보다는 구시대적인 것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해요. 또 하나 덧붙이자면, 이종필은 그런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면서도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여럿 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시대정신을, 세계를 이겨낼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죠. 이 순수함과 불안의 공존을 조금 더 양가적으로 잘 풀어냈다면 <파반느>는 훨씬 좋은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 공개된 이 영화는 그런 감각들에 공감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하게 되는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김춘수 역시도 눈 내리는 샤갈의 마을을 그리면서 같은 비판을 받았던 바 있는데, <파반느> 역시 그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거죠. 아니, 오히려 <파반느>에서는 20세기 말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한 게으름마저도 느껴졌습니다. 당찬 야심과는 달리 설득에는 실패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여러 모로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네요.


별점: 3/5


덧: 그밖에 흥미로웠던 게 하나 있다면 <중경삼림>이나 <접속>, <봄날은 간다> 등 다양한 90-00년대 로맨스 영화의 레퍼런스가 제시된다는 점 정도가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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