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retto
죽기 전에 딱 한 가지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어떤 이는 빅맥을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라고 말한다. 세상 모든 음식이 맛있는 나로서는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한다면 죽기 직전의 나를 왜 그런 질문으로 고문하냐고 되물을 것 같다. 모든 게 다 먹고 싶을 텐데 어떻게 고르라는 건지. 하지만 한참의 고민 끝에 내가 고를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지금 바로 죽는다면 15년 정도 완벽하게 숙성된 바롤로 한 병 깔끔하게 마시고 하느님께 하이파이브하러 가겠다고.
죽기 전에 딱 한 병을 마신다면 초고가의 와인을 요구해 마셔볼 법도 하지만, 마지막 한 병인데 모험 따위 하고 싶지는 않다. 죽기 전에 내 돈으로 맛보긴 어려울 것 같긴 한데 먹어보고 실망한 채로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병상에서 호흡줄 빼기 전, 마지막으로 내 손에 쥐여달라 할 와인은 체레토의 바롤로 카누비 산 로렌조(Cannubi San Lorenzo)일 것 같다. 2006이나 2009처럼 좋은 올드 빈티지로.
바롤로는 전에도 소개했듯 이탈리아 토착 품종인 네비올로만으로 만들어지는 와인이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랑헤(Langhe) 언덕 지역 중에서도 바롤로 마을을 중심으로 한 11개의 마을 내에서 재배된 네비올로를 사용하며, 최소 36개월 숙성, 그중 18개월은 꼭 오크통에서 숙성해야 한다.
대부분 랑헤 지역의 와이너리들은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를 겸하는데, 바르바레스코를 만드는 밭들은 바르바레스코 마을을 중심으로 또 따로 펼쳐져 있다. 혹자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랑헤 지역 내 똑같은 네비올로 품종으로 만드는데 뭐가 그렇게 다르냐 할 수 있겠으나, 껍질이 얇고 늦게 익는 네비올로의 특성상 떼루아에 따른 맛의 차이가 크고 숙성 기간까지 달라 전혀 다른, 훨씬 부드러운 형태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랑헤 언덕은 아주 오래전 바다였던 탓에 미네랄이 굉장히 풍부하다. 또 땅이 융기되는 시기가 조금씩 달라 언덕이 가파르게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토양의 구성이 언덕 별로 다르고, 일조량도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포도를 심는 방향, 빛을 받는 위치까지 모두 와이너리들이 신경을 써서 재배를 한다고 한다. 여기 빈야드들은 부르고뉴처럼 한 밭을 여러 와이너리가 부분 부분 소유하는 형태로, 밭 하나하나의 크기가 원체 작아서 각 밭에서 한 와이너리가 작게는 3 헥타르 이런 식으로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보니 싱글 빈야드를 내는 것은 상당히 소량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또 피에몬테 지역이 비교적 최근까지 꽤 오랜 기간 빈곤한 지역이었던 만큼, 프리미엄 와인을 내고자 나무를 쳐내고 다양한 실험을 해볼 여력을 가진 와이너리는 많지 않았다. 피에몬테 지역의 가족 경영 와이너리들은 7,80년대의 바롤로 혁신이 있기 전까지 변화에 소극적이었고, 품질보다는 양에 치중했다고 한다. 체레토는 좀 남다르다. 비교적 일찍 비오디나미를 시작했고, 프랑스산 바리끄부터 토기까지 다양한 숙성을 꾸준히 실험해 왔다. 경기 침체 때 랑헤 지역 내에 다양한 빈야드를 야금야금 사들여 생산량이 높은 와이너리가 아님에도 다양한 떼루아의 특징적인 맛을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왔다. 여전히 많은 양을 출고하지는 않으며, 양보다는 품질에 집중해 양질의 바롤로를 생산하는 와이너리이다.
방문 전 체레토가 갖고 있는 다양한 빈야드를 직접 걸어보고 흙을 만져 볼 수 있는 프라이빗 떼루아 투어를 신청했는데, 정말 1센트도 아깝지 않은,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열심히 노트 필기를 할 걸, 어디 빈야드가 limestone이 많고 어디가 marl이 많은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추후에 묶어서 글을 브런치 북으로 엮어낼 기회가 된다면 이 부분을 와이너리에 문의해 보강해야겠다) 손에 남았던 그 토양의 촉감, 잘 부서지던 흙이나 단단하던 흙, 미네랄 향이 강하던 푸른빛의 흙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미친 듯이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대체 여기가 어디가 안개가 있나 싶었다만, (네비올로 품종의 이름은 그 지역에 자주 생기는 안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밟고 있는 그 땅과 머리 아플 정도로 밝은 태양빛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 이 와인이구나, 생각했다. 그야말로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와이너리의 투어가이드 안드레아는 우리에게 떼루아 특성을 잘 반영하는 네비올로의 특성을 극대화하여 경험시켜주기 위해 체레토의 대표적인 빈야드 4곳의 싱글 빈야드 바롤로를 동일 빈티지로 시음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같은 빈티지에 같은 방식으로 숙성되는 와인을 비교 시음하니, 떼루아의 특징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취향은 Propo. 난 강렬한 타바코와 허브향을 좋아하고, 타닌도 존재감이 확실하고 까칠한, 그야말로 masculine 한 와인을 좋아한다. 프로포는 입 안에서의 츄이한 질감도 느껴지고, 타이트한 느낌이 있으면서 그 강렬함을 유지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플럼 맛이 올라오면서 조금 달아져서 아쉬웠다. 가장 섬세한 빈야드는 Brico roche. 스모키함과 미네랄이 많이 느껴지고 장미향이 올라왔다. 가장 보편적인 맛인 Brunate는 다크베리류나 블랙커런트 위주의 과실 향과 장미, 허브류의 향이 강했고 질감과 바디감이 이 가벼운 편에 속했다. 타닌의 질감이 굉장히 잘고 부드러웠고,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 카라멜이 올라오며 꽃향이 줄고 단맛이 조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브루나테는 미네랄 함량이 높아 푸른빛이 도는 특이한 흙이었는데, 토양 내 마그네슘 함량이 높다) 반면 Roche di Castiglione는 조금 더 너트 향이 주를 이루고 고소함이 느껴졌다. 브루나테에 비해 초콜릿이나 바닐라의 풍미가 느껴졌으며, 질감도 가벼웠다. 브루나테에 비해 산도는 좀 더 낮지만 타닌도 같이 약해져 조금 아쉬웠다. 로께 디 카스틸리오네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미네랄이 느껴지고, 과실 단맛이 더 지속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같은 해에 만들어진 와인이, 서로 몇 마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이렇게나 맛이 다를 수 있다니 그저 와인의 섬세함에 늘 놀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안드레아는 우리에게 Cannubi San Lorenzo 싱글 빈야드 바롤로 2010 빈티지를 맛 보여 주었는데, 동일 빈야드는 비교할 수는 없어 아쉬웠지만, 카누비 산로렌조의 강한 허브향과 스파이스, 얼씨한 향, 약간의 스모키함에 시간이 주는 섬세함이 더해져 그야말로 천상의 맛을 냈다. 높은 산도와 강렬한 맛으로 이것이 진정한 바롤로다, 하고 외치는 듯한 와인이었다. 눈을 감고 천천히 이 와인을 마셨을 때, 정말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죽기 전에 먹어봐야 할 와인은 태산이지만, 이 와인을 이길만한 와인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