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ingut Robert Weil
와인은 정말 넓은 범위에서 자란다. 양조 가능한 포도가 자랄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와인 산지가 될 수 있으니, 북반구의 미서부부터 남반구의 호주까지, 위도의 폭으로 따지자면 커피가 자랄 수 있는 커피 밴드보다도 더 넓다고 봐야 할 듯하다. 특정 포도 품종은 낯선 땅에서도 쉽게 뿌리를 내리고, 어떤 품종들은 대대로 나고 자란 기후와 토양이 아니면 열매를 잘 맺지 않아서, 지역별로 떼루아의 차이를 즐길 수 있는 포도종이 있는가 하면 그 지역에서만 나오는 품종도 있다. 리슬링은 사실 아주 예민한 품종은 아니어서, 신대륙 쪽에서도 자주 재배되고는 하지만, 비교적 서늘한 기후가 필요하고 이른바 와인종주국 프랑스에서 주력으로 키우는 품종이 아닌 편이라 (독일과 국경을 접한 알자스 정도에서 키우는 정도) 신대륙에서도 메이저 품종은 아닌 편이다. 그래서 여전히, 리슬링 하면 대부분은 독일을 떠올리게 된다. 독일에서 자라는 포도 품종의 약 1/4이 리슬링이라고 하니, 독일 하면 리슬링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최근 기후변화덕에 점점 피노누아 같은 레드와인 품종들이 북상하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독일에서는 리슬링(Riesling), 피노블랑(독일어로 Weißburgunder, 바이스부르군더),피노그리(Grauburgunder, 그라우브루군더), 실바너(Silvaner)와 같은 화이트 품종이 대세를 이룬다. 리슬링은 독일 토종 품종 중 하나로, 주로 미네랄과 파인애플이나 시트러스 기반의 과실향, 가솔린향이 주를 이루는데, 수확 시기 등에 따라 당도가 달라진다. 늦게 수확하는 포도 품종으로, 내가 좋아하는 네비올로나 피노누아 품종처럼 떼루아의 특성을 많이 반영한다. 늦게 수확할수록 포도의 당분이 농밀해져 많이 달아지는데, 당도가 높을수록 등급이 높아지는 리슬링 특성상 드라이한 화이트와인을 즐기는 나에게는 오히려 낮은 등급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좋은 경우이다. 대부분 높은 등급을 접하거나, 최소 아우슬레제 급을 접하는 경우가 많아 리슬링은 단 와인이라는 편견이 많다. 하지만 트로켄은 드라이하면서도 그 특유의 가솔린향이 매력적이다.
그냥 듣기에 가솔린 향이라고 하면 그걸 왜 먹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실향과 묘한 그 휘발유 느낌이 나는 향이 섞였을 때 굉장한 매력이 된다. 아세톤 향이 나는 버번이 인기 있는 이유와 동일하지 않을까. 아직 시도해보지 않았다면 꼭 시도를 추천한다.
리슬링은 대부분 대형 와이너리에서 포도를 모두 구매하여 대량 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전반적으로 가격대가 높지 않은 편이라 주질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맛볼 수 있다. 많은 생산자 중 내가 방문한 곳은 로버트 바일 와이너리(Weingut Robert Weil)로, 독일 최고생산자협회 (VDP)의 일원이자 고급 리슬링을 만드는 곳이다. 마인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대중교통으로 비교적 편하게 방문이 가능했다.
마인츠에서 로버트 바일 와이너리를 가려면 거쳐가야 하는 작은 마을, Eltville. 간이역이 있는 굉장히 작고 예쁜 마을이라 가는 길에 둘러보기 좋았다.
와이너리의 내부와 주변 풍경은 블로그에 올려두었다. 정말 좋았던 날씨.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와이너리들과는 달리 독일 와이너리들은 대개 개인이 신청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이 따로 없고, 따라서 와이너리 내부시설을 보기는 어렵다. 다만 대부분의 와이너리들이 자체적으로 와인샵을 운영하고 있어 다양한 등급의 와인들을 무료로 시음할 기회를 주며 와인 정보를 제공한다.
로버트 바일도 마찬가지. 친절한 직원이 우리에게 총 4종류의 와인 시음을 도와주었다. VDP 등급을 따라 트로켄(드라이) 한 와인들을 구츠바인부터 GG*까지 시음했다. 리슬링도 다른 유럽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레지오날급들이 가장 낮은 등급, 그다음은 빌라쥬, 그다음은 빈야드로 간다.
구츠바인은 VDP 와인 생산자의 지역에서 나는 와인으로, 올츠바인은 마을 내에서, EG(Erste Lage) 등급은 높은 등급의 밭에서, GG*(Grosse Lage) 등급은 최상위 등급 밭에서 나는 포도를 활용한다.
제일 먼저 시음했던 구츠바인 등급 라인가우 리슬링과 오츠바인 등급 키에드리커 리슬링. 라인가우는 해당 지역, 즉 주의 이름으로, 독일 내에서 와인 생산으로 가장 유명한 주이다. 키에드리커는 로버트 바일이 있는 마을 지명으로, 각자 레지오날과 빌라주 급으로 생각하면 편할 듯하다. 라인가우는 파인애플과 같은 과실이 강하고 키에드리커는 좀 더 산미와 미네랄이 강했다. 확실히 오츠바인 급으로만 넘어가도 조금 더 미네랄과 복합미가 강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후 EG등급 와인들. 투름버그와 클러스터버그 밭에서 나는 와인들을 맛보았다. 여기서부턴 스틸탱크가 아닌 오크숙성이라 한다. 각 밭의 맛이 굉장히 달랐다. 클러스터버그는 과실이 주고 투름버그는 미네랄. 특히 투름버그는 특유의 가솔린 향도 꽤 났다.
이 트룸버그를 우리가 좋아하니 직원분이 2018년 빈티지를 같이 맛 보여주었는데 숙성이 되자 깊이감이 엄청나졌다. 과실도 올라오고 가솔린향은 강력해졌으며, 몹시 복합적인 맛을 냈다. 리슬링은 고숙성이 가능한 품종이라지만 주로 가격대가 낮아 오래 묵힐(?) 생각은 안 했었는데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오히려 그 후 마신 GG* 2020보다 훨씬 맛있었다. 역시 숙성이 가능한 품종은 시간을 들여야만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물론 각 밭의 특성이 많이 묻어나는 품종이라 밭의 차이가 있겠으나, 숙성도를 이길 순 없었다. 그라펜버그의 숙성버전을 비교시음할 수 있다면 가장 좋았으련만,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마지막으론 스위트한 높은 등급 와인을 마셔볼지 아니면 스파클링을 마셔볼지 물어보는데 대부분 TBA등급이 훨씬 비싸니 그걸 먹어보겠다 하겠지만 우린 비싸도 단건 싫다 말했다. 재차 직원이 되물어봤지만 그냥 브뤼를 마시기로 했다. 확실히 샤도네이나 피노누아를 베이스로 하는 샴페인과는 결이 좀 다른 맛이었다. 좀 더 미네랄이 강하게 느껴지는.
마지막으로 와인을 사서 나왔는데 가격은 사실 마인츠 시내 와인샵과 차이가 없었다. 다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2018빈 투름버그을 구매하겠다 하니 2021년 빈과 가격을 같이 주는 것이었다. 아무리 와이너리에서 바로 구매하는 것이라 해도 보통은 좀 묵으면 몇십 유로라도 더 붙여 파는데... 이건 좀 뭐랄까, 고객입장에서야 고맙지만 좀 덜 양심적(?)이어도 되는데. 그들은 어차피 나머지 다 솔드아웃이고 2018빈만 몇백 병 남았다고 하니 동일하게 받겠다고 해서 넙주 몇 병을 사 왔다.
그러니 혹시나 라인가우 지역을 방문할 일이 있다면 꼭 와이너리를 들러보길 바란다. 다양한 라인업을 무료로 시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운이 좋으면 더 오래된 빈티지를 손쉽게 같은 가격에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직 리슬링 특유의 가솔린 향을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국내에서는 이마트에서 요즘 많이 판매되는 슐로스 볼라즈 (Schloss Vollrads) 리미티드 에디션을 추천한다. 구츠바인 급으로,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리슬링 중 꽤 가솔린 향이 살아있다.
Weingut Robert Weil
Mühlberg 5, 65399 Kiedrich
+49 6123 2308
월-금 08:00 - 17:30
토 10:00 - 17:00
일 11:00 - 17:00
https://goo.gl/maps/FgH1BjDtqAzDUJM8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