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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Nov 05. 2017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

사당동 더하기 25 - 조은 


 '가난'이라는 단어는 왠지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개인의 의지나 노력 여부에 따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시련 정도의 어감. 실제로 우리는 가난한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됐다거나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는 등의 성공 신화를 종종 듣는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롤 모델로 추앙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시련이 있어야 인생이 더 풍성해진다고 말한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나도 열심과 끈기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마구마구 끓어오른다. 시퍼런 청춘이 펄떡인다. 


반면 '빈민촌'이라는 말을 들으면. 갑자기 힘이 쭉 빠진다. 싸우는 소리와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여편네는 한 켠에서 실컷 두들겨 맞고 있을지도 모른다. 집 나간 엄마나 그 빈자리를 대신하는 쭈그렁 할머니, 그 틈에서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그늘진 아이의 얼굴도 보인다. 진절머리 날 만큼 간절하게 탈출하고 싶은 공간, 그러나 끈질기게 내 발목을 잡아끌어 나를 주저앉히는 늪, 지긋지긋한 이놈의 집구석과 같은 표현이 떠오른다. 


가난과 빈민촌이 실상 크게 다르지 않은데 두 단어가 주는 어감은 어찌 이리 다른지. 때때로 우리는 가혹한 현실을 너무나 쉽게 한 단어로 미화시키기도 한다. 


철거라든지, 재개발은 어떤가. 폐허가 된 건물들. 건물 벽에 무섭게 쓰여있는 시뻘건 X표. 군데군데 허물어진 담장 하며,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들. 철거 반대 시위나 경찰들과의 대립, 그 가운데 무참히 스러진 사람들. 더 이상의 연상이 힘들다. 장면, 장면이 아프다. 삶은 처절하다. 


'목숨'을 걸고 주거권을 사수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후루룩, 읽고 넘어갈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닌 생생하게 피비린내 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끝끝내 숨 쉬며 살아내야 하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책에 담겨 있다. 벗어나려고 아무리 힘껏 발버둥 쳐봐도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단단한 굴레의 무게가 책을 통해 전해진다. 


책장을 덮으니 우리 사회는, 우리 개개인은, 아니 나는, 앞으로 어떤 자세로 인생을 대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치열한 경쟁이라면 전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대한민국, 삼포 세대가 출현할 만큼 팍팍한 한국 사회.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아찔하리 만큼 버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돼 있는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될 때 우리 사회는 좀 더 따뜻해질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은 그 첫걸음을 마련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불편하기도 했다. 그들의 방에서는 가난의 냄새가 난다는 둥, 왜 그들은 맨날 싸우기만 하고 술이나 마시고 다니면서 가난을 이겨낼 생각은 하지 못하냐는 둥, 왜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냐는 둥, 이렇게 좁은 방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 하였다는 식의 말들, 그들의 삶이 마치 대단한 발견이나 혹은 엄청난 깨달음인 것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주고받는 대화들. 생살 냄새가 진동하는 그들의 삶을 학문의 대상으로 관찰하는 교수와 연구원들의 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소 당황스럽다. 


하지만 나 또한 그들보다 무엇이 더 나은지. 이 글을 쓰면서 혹시 나도 이 책의 교수와 연구원들과 같은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나의 글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염려됐다. 고민하고 조심하면서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몇 번이나 문장을 쓰고 지웠다. 부디 나의 미숙한 글로 인해 아무도 아파하지 않기를.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특히나 누군가의 생 앞에서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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