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경제체계의 발달은 인간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보다는 그 체계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경제 체계의 성장에 유리한 것은 인간의 행복도 촉진시키는 것이라는 명제를 내세워서 그 첨예한 모순을 얼버무리려고 했다.
며칠 전, 엄마 친구 아들이 죽었다. 40대 중반, 어느 대기업 부장이었던 그 아들은 어느 토요일, 머리가 아프다고 가족들에게 말을 했단다. 단순한 두통이거니 생각한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대수롭게 생각지 않고 잠을 청했다. 그 아들은 회사에서 채 마치지 못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그날 밤 숨을 거뒀다.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나라 40대 중반 남성의 돌연사.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중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에리히 프롬이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가 그동안 체계의 성장만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입시 스트레스에 내몰려 병든 청춘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 취업을 위해 학점, 어학연수, 인턴, 자원봉사 등을 좇느라 꿈을 잃은 젊은이들. 취업을 해도 돈이 없어 결혼을 못하고 결혼을 해도 집이 없어 아이를 못 낳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사교육이며 기러기 아빠까지. 우리 사회에는 한 인간의 행복 따위를 운운할 조금의 겨를도 없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나는, 소유적 인간인가, 존재적 인간인가. 당연히, 소유적 인간. 입시,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자식, 사교육 등등 위에서 언급한 것들 중 단 하나라도 결여될 경우,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소유하기 위해 아등바등 기를 쓸 것이다. 단순히 아등바등하는 정도가 아니다. 내가 목표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실제로 나는 위경련이나 원형탈모가 생길 정도로 큰 압박감을 느낀다. 어떤 일에든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는 성실함이 나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사실 나는 뒤쳐짐이나 결핍을 극도로 무서워하는 소유적 인간인가 보다.
오히려 존재의 본질이 바로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실정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에 따르면 소유적 실존 양식을 따르는 자는 가진 것을 잃을 때 자신의 존재도 함께 사라진다. 그의 말이 맞다. 지금의 나는 그의 말대로 '나 자신을 잃었다.' 번듯한 명함, 직장에서의 내 책상, 고정적인 월급이 없으니 내 가치가 완전히 쪼그라진 기분이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나를 소홀하게 대접한다. 그럴듯한 대학 타이틀, 대단하지는 않지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기업에 다닐 때와 놀고먹는 아줌마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동쪽과 서쪽만큼이나 다르다.
에리히 프롬은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텅 비워야 진정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에리히 프롬도 진정한 자아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입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재산이나 소유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소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정적인 월급이라든지, 최소한의 연금 등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안정적인 소유가 없다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데.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한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에리히 프롬은 가진 것에 의존하는 태도에서 두려움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뒤로하고 불확실한 세계로,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기에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을 이긴 자가 곧 '영웅'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는데. 가진 것이 없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걸까. 일이 잘 안 풀려 봤자, 사람들이 나를 조금 무시해 봤자, 크게 잃을 것이 없는데. 그저 지금의 상황이 유지되는 정도인데. 어쨌든, 알량한 내 스펙,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 굶지는 않으니 이 정도의 소유를 잃을까 불안한 걸까. 지금 내 손안에 있는 것들 사라진다면, 막막하긴 할 테다.
산만한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어서 그 성격의 변화가 요구되는 사람의 경우에는 지향하는 성격 변화에 상응하는 실천적 생활습관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항구적인 치유는 기대할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의문도 생기고 반박도 해보며 머리가 복잡하긴 했지만, 그의 말처럼 나도 변화하고 싶다. 당당한 사람으로,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으로. 시시하고 초라한 모습이 아닌, 작은 것에 전전긍긍하지 않는, 남들이 뭐라 하든 확고한 나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서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 조금 도도해졌다. 내 손은 지금 아무것도 쥔 게 없지만 대신 지금 이 시간, 혼자 조용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다. 남들 눈에는 시시껄렁하고 쓸데없는 일. 그러나 사람들과는 다른 꿈을 꾸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특별한 존재다. 불안하고 성급한 마음들은 모두 저 뒤로 날려 버린다. 나는 아직 에리히 프롬이 말한 존재적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은 사람이다. 누군가 나에게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