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한 스푼, 답답함도 한 스푼

오늘의 기록

by 노랑연두

오늘은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던 날이다.


일단 엊그제부터 아프던 허리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통증이 있어서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오늘 스웨덴어 읽기 연습 시험을 봤는데 모르는 단어수가 많이 줄어들어서 기뻤다. 그 전에는 모르는 단어를 적으면 a4에 한가득이었는데 이제는 3분의 1 정도로 줄어든 것! 오전반 수업으로 바꾸고 나서 매일 가고 꼼꼼하게 배우니까 일주일에 두 번 가는 저녁 반보다 훨씬 빠르게 느는 느낌이다. 여전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끝나자마 바로 "실행(execution)"이라는 과목의 조모임을 하러 갔는데 그게 자꾸 나를 답답하게 만든다. 이 수업은 창업자 과정의 하나로,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행하는지, 즉 어떻게 사업화하는지를 배우는 수업이다.


우리 조의 아이디어는 카플링 앱이다. 이 아이디어를 낸 조원은 이탈리아 애인데, 자기네 나라에서는 blablacar라는 카플링 앱을 엄청 많이 사용한단다. 근데 스웨덴에 오니 없더라 그러니 내자.라고 제안했다.

'있으면 좋겠네'라고 해서 차선책 정도로 rating을 주고 나는 다른 아이디어에 힘을 실었는데, 두 명 vs 두 명 의견이 갈렸다. 결국 이탈리아 애가 엄청 강하게 주장하고 나랑 똑같은 걸 선택한 독일애가 분쟁을 피하려고 물러나니 카플링 앱이 애매하게 선정되었다. 집에 와서 남편이랑 얘기하는데 "이미 너무 오래된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2007년부터 위치기반으로 하는 비즈니스가 엄청 많이 생겼단다. 이미 단물이 빠져도 한참 빠진 아이디어라니 단점들만 엄청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건 뒷전이고 다른 조원들은 캐치프레이즈 정하고 로고 만들고 이런데 관심이 팔려있네. 코어 밸류가 중요하고 경쟁력을 만드는 게 더 우선인데 빈수레에 방울만 잔뜩 걸고 있는 거 같아 한심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와중에 나 혼자 사업성을 따지고 있네.


십여 년 전부터 전 세계에서 유행을 했으면 분명히 스웨덴에서 똑같은 게 있을 텐데, 왜 안 되었을까? 규제 때문인가? 스웨덴 문화 때문인가?
우리의 강점은 뭐지? 다른 애들은 "first mover"라는데 만약 다른 카플링 앱이 스웨덴으로 진출하면 그 장점이 지속될까?
이미 기존 카플링 앱은 단순 카플링 매칭을 넘어서서 버스, 여행 관련한 업체를 인수하며 종합 운송사업으로 커졌는데? 지금 와서 하는 게 의미가 있나?


설상가상으로, 계속 찾다 보니 스웨덴에도 카풀링이 있다. 2007년부터 시작해서 이미 앱도 만들었었고 자금부족으로 2017년에 앱을 중단했단다. 지금은 페이스북 그룹으로만 운영 중인 상태였다.


이 얘기인즉슨, 우리가 가졌던 거의 유일한 장점인 스웨덴 시장에서의 first mover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 동시에, 사업성이 높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계속 애들은 앱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둥, 그래서 현재는 앱이 없으니 경쟁자가 없는 게 아니냐는 둥, blablacar는 잘되니 이것도 잘 될 거다라는 둥.. 전혀 조사나 분석에 기반되지 않은 얘기를 하고 있다. 적어도 스웨덴에 다른 카플링 서비스는 왜 더 커지지 못했는지 왜 서비스를 중단했는지 그전에 서비스는 무엇이 부족했는지 확인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우리의 타겟 그룹이 뭐냐니까 비용을 절감하며 이동하고 싶은 모든 사람이란다. 그럼 광고는 누구를 타깃으로 해서 만드냐니까 모든 사람이란다. 아이쿠야..


STP(세그먼테이션, 타겟팅, 포지셔닝 )을 핀란드에서는 고등학교부터 배운다는데.. 얘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모두가 타겟이라는 말은 그 누구도 타겟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고. 비지니스 아이디어를 낼 때 특정 사람이 갖는 특별한 문제 집중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게 우리 사업을 알리고 모두에게 맞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자원이 없다고. 같이 듣는 다른 수업 " ideation"에서 교수가 매번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데.. 얘는 타겟이 "모든 사람"이라니 정말 답답하기가 그지없다.


지난번 전략적 마케팅 수업 조모임도 그렇고, 이번 조모임도 그렇고.. 이 분야에서 너무 당연한 건데 그걸 모르고 안 받아들이고 이상한 소리 하는 게 너무 답답하다. 그렇다고 내가 교수도 아닌데 애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당연히 나에게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그리고 영어로 설득하는 것도 너무 버거워서 결국 포기.


그리고 이탈리아 애는 맡은 장표는 지난번 조모임 할 때랑 나아진 게 없네. 전형적으로 말만 많고 자기 할 일 안 해오는 애라고 생각하니까 더 화가 나네.


아무튼 그렇게 2시간을 조모임을 하고 나니까 기분이 별로다.


아 나는 왜 맞는 걸맞다고 설득시키지 못하는가, 왜 나는 우리가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 개선하지 못하는가. 나는 왜 내가 생각해낸 괜찮은 아웃풋을 혼자라도 만들어내서 공유하지 못할까.


이래저래 자괴감이 들어 이 글을 쓰며 마음을 다스려본다.


그래.. 개인과제나 잘해서 내면 되지.

하지만 다음 주 금요일까지인데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것. 내일 시작이라도 해야지.


바꾸지 못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 관심과 신경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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